그냥, 보통 사람

아이들에게 배울 때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 있다. 더 이상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풍경을 하노이에 와서 매일 목격한다. 베트남을 ‘성장 가능성 있는 나라’, ‘미래가 밝은 나라’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아파트에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씩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시간에는 세계의 미래들을 만날 수 있다. 오전 7~9시가 되면 큰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간다. 그들이 지나간 빈 공간은 할머니들과 어린 아기들이 채운다. 그들만의 파티 타임이 시작됐다. 아기와 혈연관계인 할머니인지 유모인지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냥 아이를 돌보는 동병상련 입장의 할머니들이다.


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드레스 코드가 필요한 모양이다. 화려한 무늬의 편한 몸빼(?) 바지를 입고 신고 벗기 편한 슬리퍼를 신는다. 그래야 먼지 걱정 없이 아이들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할머니 품을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잡으러 갈 때도 바로 전력 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은 5:5 가르마를 타고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정갈하게 하나로 묶는다. 머릿결 관리 비법을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할머니들의 머리카락은 잘 씻은 미역줄기처럼 빛나고 찰랑거린다.


할머니들끼리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이 어린 아기들만의 세상 구경 파티도 시작된다. 아기들 숫자만 다 합쳐도 수 십 명은 돼 보인다. 한 유치원의 아이들을 풀어놓은 정도의 숫자다.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은 유모차 안에서 눈으로 세상을 구경하느라 바쁘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담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낯선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누군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익숙한 사람을 보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선보인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까지도 무장해제시키는 그 미소를. 입은 한시도 쉬지 않는다. 세상을 구경하는 동안 우유병을 빨기도 하고 이유식을 음미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 눈과 입에 들어오는 기분 좋은 자극을 그들은 진정으로 즐긴다.


걸어 다니는 아기들에게 신발은 거추장스러운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맨발로 전력 질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세상을 탐험한다. 할머니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할머니의 품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아이와 그 아이를 종종거리며 잡으려는 할머니의 기싸움이 시작된 거다. 이 싸움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밌다(당사자는 죽을 맛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체 따라간다. 초반에는 아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할머니의 완력이 들어가는 순간 대부분 할머니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아이들의 세상 구경 파티는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매일마다 열린다.


그나마 평화로웠던 오전이 지나 오후가 되면 단지 안은 활어가 팔딱팔딱 꿈틀대듯 생명력 넘치는 시간으로 변한다. 어린 아이들부터 큰 아이들까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낸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킥보드, 스케이트보드, 자전거 등을 타고 단지를 돌며 그들만의 코스를 만들고 한쪽에서는 한바탕 농구 시합이 벌어진다. 다른 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인라인 스케이트 강습을 받는다. 유치원생 어린 친구들도 놀이터에서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차례를 지키며 미끄럼틀을 타고 한 명이 뛰면 여러 명이 덩달아 뛴다. 한 명이 철봉에 매달려 힘자랑을 하면 자기도 해보겠다고 덩달아 매달린다. 놀이터에서 세상을 알아가고 규칙을 스스로 터득한다.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다. 파워 워킹을 하거나 운동기구에 몸을 맡기고 요가매트나 수영 도구를 챙겨 바삐 걸어간다.


아이들이 자연스레 어울려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바다 건너 들려오는 인종차별, 갈등, 차별 등 부정적인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베트남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그 외의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한 체 어울려 살아간다. 베트남인은 베트남인답게, 한국인은 한국인답게, 일본인은 일본인답게.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어가 달라도 상관없다. 언어가 안 통하면 몸짓으로 말하면 되고 몸짓으로도 안 통하면 눈치를 발휘한다. 아이들끼리는 굳이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통방통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 사이에 어떤 차별적인 요소를 들이미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은 그냥 다 똑같은 아이들이다.


지구 어딘가에서 인종차별로 폭언과 폭행을 당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한 수 배울 때다. 우린 모두 그냥, 보통 사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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