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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Dec 05. 2020

머앵 골민 빙새기 웃기만허는 아이

 해석] 뭐라고 말하면 배시시 웃기만 하는 아이

#아래 아 표기 적용 안됨.


 지금도 잊지 못한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그해 12월, 육지라면 한창 겨울이었을 걸 봄바람처럼 훈훈한 바람과 하늘과 맞닿은 저토록 파란 바다, 지금이라도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서귀포 바다에 한껏 정신을 빼앗겨 버렸던 그날을. 탄성과 함께 오래도록 보다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어지러움 비슷한 두려움도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이곳에 올 때까지 바다라고는 봐 본 적 없는 북쪽의 끝 강원도 철원에서 산타기를 즐기던 나였으니 놀라울 만도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평야 지대였던 철원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로 보였다. 뾰족뾰족한 소나무, 잣나무 같은 침엽수만 보다가 바람에 몸을 흔들어대는 저 유연하고 부드러운 넓은 잎들을 가진 나무들도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제주가 고향이셨지만 30여 년 간 강원도 최전방에서 이어진 군 생활에 우리 남매들은 모두 근무지였던 철원 근처에서 태어났다. 엄마들의 계모임은 왜 그렇게 잘 깨졌던 걸까? 그 당시 어느 동네에나 한 번 씩은 있었음직한 사건, 엄마의 계모임이 잘못되는 바람에 힘들어진 아빠는 일단 막내인 나를 뺀 삼 남매를 제주도로 먼저 보내셨다. 대학이며 고등학교며 육지에서 뜻을 펴야 하는데 오히려 제주로 보내서 미안하다는 아빠의 마음이 한가득 담긴 결정이었다. 막내라는 이유로 부모님 곁에 머무를 수 있었던 나도 중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에 마지막으로 제주로 합류하게 되었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은 1년 뒤에나 올 예정이었다.      

 그렇게 서귀포시 일호광장 근처에서 우리 남매들의 소꿉놀이 같은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먼저 와 있던 언니, 오빠는 여유로운 서귀포 사투리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나! 전학 온 첫 날부터 알 수 없는 말들에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나마 학교 친구들은 “~ 핸?(했니?)” 또는 “~ 간?(갔니?)”처럼 말끄트머리만 짧게 써서 눈치껏 알아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 해비연?”(했니?)이라는 새로운 활용형이 나오면 잠깐 움찔할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보다 해 볼만하다고 여겼다. 전혀 새로운 사투리를 알아가는 재미에 겨울 방학이 다가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날 학교가 파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물으셨다.

“게난 아이들 다 풀어샤?”(그러니까 아이들은 다 끝났니?)

응? 풀었냐고? 어디 묶여 있었나?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내가 답답한 만큼 대답이 없는 내가 답답하셨는지 할머니가 재차 물으셨다.

“아이들 다 풀었시냐?”(아이들은 끝났냐?)

“네? 아.. 몰라요.”

 나는 그저 어설픈 웃음만 한껏 장착한 채 최대한 예의바르게 모른다고 대답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한마디 하신다.

“자인 좀 두린 아이인 모양이여. 머앵 골아도 빙새기 웃기만 허곡 말은 안 허곡. 쯧쯧”(저 아이는 좀 어린-모자란- 아이인가 보네. 뭐라고 말해도 배시시 웃기만 하고. 쯧쯧.)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가 나를 참 안되게 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두린 아이”가 되어 버린 억울함, 바보처럼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은 꽤 오래 갔다. 친척들이 사는 시골에라도 갈라치면  나에게 쏟아지던 시골 어른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사투리는 나를 무슨 말만 하면 웃기만 하는 아이로 만들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곤밥 먹은 소리(‘곤밥’은 ‘흰쌀밥’의 제주도 사투리로 ‘곤밥 먹은 소리’는 ‘서울말’을 뜻한다.)” 한다며 알 수 없는 마뜩찮은 반응들이 있어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또 생긴 버릇이 말끝을 흐려버리는 것이었다. 서울말도 아닌 것이 제주말도 아닌 것이, 뭔가 명쾌하지 않은 애매함이 가득한 화법이었다.     


 게다가 표준어와 비슷한 형태의 제주어가 그 의미에 있어서는 순식간에 뜻이 180도 다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표준어의 “요망”은 “요사스럽고 망령되다, 행동이 방정 맞고 경솔하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자이 저 요망 보라.”(저 아이 저렇게 방정맞게 경솔한 것 봐.)처럼 쓰이다가도

 제주어 “요망지다”로 쓰일 때는  

“자이는 참 요망진 아이여.”(저 아이는 참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네.)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말이 나를 칭찬하는 건가 욕하는 건가, 화를 내야 하나 좋아해야 하나 마음의 갈등을 겪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토록 낯선 제주어가 그래도 나는 재미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35년 가까이 살아온 이력도 있지만 제주 토박이로 여길 정도로 자연스러운 제주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 평균 또래 기준의 제주어를 말한다. 내 또래 토박이들에게도 제주의 어른들이 쓰는 제주어는 어렵기만 하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건 소통의 가장 기본이다. 그 기본에 서투른 채 섬 한가운데 툭 떨어진 나의 처지가 안 되기는 했었지만 그만큼 재미가 넘치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웃음을 불러오는 오해의 순간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큰 당혹감이었는지. 그래도 지금 웃을 수 있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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