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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Aug 12. 2022

나의 사랑하는 생활 열전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을 읽고 나서 문득.....

 요즘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느닷없이 이별한 아빠와의 기억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한 안타까움에 한참을 머물던 나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은 특별히 애정하는 시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네발이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하는 엄마가 기우뚱한 걸음으로 마당 한 켠 컨테이너 텃밭까지 기어코 가서는 당신의 반려 채소들을 흐뭇하게 소개해 주는 모습을 좋아한다. 무심하게 커서는 노란 꽃 밑으로 또록하니 열매를 맺은 수박 모종이 기특하고 *아꼬와서(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커다란 오이 잎사귀 뒤로 숨겨 놓았다며 딸에게만 살며시 들춰 보여주는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시간을 사랑한다. 무슨 일인지 고춧잎이 벌레 먹는다며 속상해 하다가 그 범인이 작은 달팽이임을 알고서는 달 기우는 지난 봄밤 내내 몇 마리나 잡아냈다는 엄마가 그지없이 정겹다. 울릉도의 화산 맞은(?) 돌을 올레 삼춘이 갔다 줬다면서 가스불에 잘 구워 수건에 싼 채 어깨며 팔이며 쓱쓱 문지르니 이만큼이나 팔을 올리게 됐다는 엄마의 순진한 얼굴빛은 또 어떤가. 


 27살, 군인인 아빠를 따라 육지로 가기 전 대평리 바다의 큰잠녀로 기대 받던, 내가 미처 몰랐던 젊은 엄마의 당당한 목소리를 듣는 것 또한 마음 울렁이는 일이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 대신 외할아버지가 준비해 주신 생선과 쌀과 먹을거리를 들고 고무신을 신은 채 육지로 간 서러운 스물 일곱 엄마는 이제 85세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50년의 엄마와의 시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엄마를 만나는 것 같은 지금 이 사랑스런 시간을 나는 앞으로도 오래 누리고 싶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나도 우리 아이들과 살가운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 육군 일병 큰아들의 나름 귀여움을 장착한 “앙” 대답 문자를 보고 또 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큰아들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따듯하다. 가끔은 감당 못 할 치명적인 귀여움을 들이대는 엄마라도 그저 귀엽다고 눙치는 작은아들의 유머 가득한 웃음을 좋아한다. 작은아들이 귀가하는 금요일, 함께 내려오는 차 안에서 서로의 일주일 안부를 챙기는 속 깊은 대화는 벅차고 그 아들들의 귀 파주기를 또 즐긴다. 용돈을 챙겨주며 귀를 파주는 데 진심인 이유는 어린 시절 따뜻한 햇볕 들어서는 쪽마루에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웠던 노곤한 느낌과 나처럼 귀 파주던 엄마의 기억이 까마득히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나는 시원한 빗소리를 좋아한다. 시원한 빗소리가 나려면 꽤 많은 양의 씩씩한 비여야 한다. 오래 내리는 비라면 더 좋을 일이다. 베란다 창문을 닫아 놓았어도 기세 좋게 문을 후두둑후두둑 두드리는 빗소리여야 제맛이다. 그런 날이면 죽죽 내리는 빗물에 가려지는 창문 밖의 세상을 멍하니 보는 일은 *오소록하면서도(아늑하면서도) 포근하다. 그렇게 집에 배 깔고 누워 책을 읽는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춤한 날이다. 그 세찬 비를 뚫고 달려와 줄 오랜 벗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오돌뼈에 김가루밥과 시원한 맥주가 아닌 김치전에 막걸리라도 기쁘게 마시며 뿌듯해 할 것이다. 

 

 나는 모든 어린 것들을 좋아한다. 특히 통통한 강아지가 문턱에 배가 걸려 넘어서지 못하고 애쓰는 모습이나 어느 한 방향으로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아기의 서툰 걸음에 함께 놀라 삑삑대는 앙증맞은 신발 소리에는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짐짓 콧대 높은 척하다가 반전 허당기를 보여주는 귀여운 고양이의 꾹꾹이를 좋아한다. 언젠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리라 생각만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꼬꼬마 형아가 그보다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 앞에 선 조심스러움을 사랑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바짝 들어 올린 꼬꼬마 형의 단호한 팔이 대견하고 좋다.


 나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 여행 계획 세우기는 떠나기 전의 기분 좋은 설렘과 긴장감을, 수업 계획안은 깔끔한 느낌을 선물해준다. 그래서 가끔은 수업하는 것보다 수업안만 짜 주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곤 한다. 나의 계획 세우기에 대한 즐거움을 알 리 없는 남편은 제발 계획 따위 세우지 말라고 말리지만 각종 계획이 담긴 수첩과 탁상달력은 늘어갈 뿐이다. 물론 계획은 계획일 뿐 실행에 앞서 지레 지쳐버리기 일쑤지만 그래도 이만큼의 계획이 있어서 지금까지라도 버텨 온 것은 아닐까.  


 수업이 많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좋지만 예기치 않은 휴강은 마음으로 더욱 환영한다. 코로나 시국에 휴강이 많아 힘든 면도 있었지만 휴강이 휴가 같은 기분을 내주곤 했다. 살다 보면 내가 애써도 되지 않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애씀에 힘들이지 말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애써 느긋해 볼 일이다.      

 

 깔끔하진 않지만 각 맞추는 것에만 뿌듯하고 집안일은 못하지만 설거지는 그냥 기분이 좋아 즐겨한다. 각 맞추어 캐리어 짐 싸기를 좋아하는데 코로나 시국으로 작은아들의 기숙사 짐 싸기로 대신하며 3년째 버티고 있다. 큰아들이 전역하고 둘째의 입시가 끝나면 가족여행을 떠나볼 만하지 않은가.      

 

 혼자 노트북 들고 카페에 앉아 뭔가를 끄적이다가 책도 읽다가 들고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옆 테이블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귀가 팔랑팔랑 열려 같이 낄낄대기도 혹은 함께 공분하는 혼자놀기의 달인급이라고나 할까.     

 

 어떤 공모전이 있는지 한 번씩 둘러보는 재미를 좋아하고 가끔씩 운 좋은 응모로 얻는 소소한 글로소득이 즐겁다. ‘이 나이에 그림책이라니’라는 컨셉으로 좋은 그림책을 소개하는 책도 만들어 보고 싶고 좀 더 나이가 든 어느 날엔 누구라도 친구가 되는 마술 같은 공간 북카페의 할머니 주인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굉장한 무엇이 되진 않더라도 그렇게 쭉 글을 써 나가는 사랑스러운 나의 생활과 함께, 그럭저럭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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