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꽃밭을 태우다』

_ 타는 건 창고인가, 감정인가



이사는 갑작스러웠다.

집주인이 계약 연장을 거부했고,
원인은 애매했다.
세입자의 ‘느낌’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이삿짐 견적은 생각보다 비쌌다.
현금은 빠르게 줄었고,
카드 한도는 이미 수개월 전, 자주 넘겨졌다.

그는 계좌를 열었다.
정확히는 주식 계좌.
매도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그곳은 ‘꽃밭’이라 불렸다.

거기엔 시간이 심어져 있었다.
퇴근 후에 흘린 분석 리포트,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정리한 산업 트렌드,
배우지 않은 기술적 분석 그래프,
낯선 숫자 언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조용한 기대.

그 꽃밭은
이름을 가진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감정의 온도와 색으로 배열된
일종의 정신적 수경 정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어떤 걸 팔아야 이사가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떤 걸 먼저 버려야 아프지 않은가?”


그건 투자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이주민의 태도에 더 가까웠다.
아니, 도망자의 태도에 가까웠다.


그는 매도 버튼을 눌렀다.
하나씩, 조용히.
화면 속 그래프들이 줄어들고,
수익률이 사라지고,
색이 바랬다.


가장 먼저 판 건 '봄'이었다.
수익을 줄 것 같았고,
처음엔 예뻤지만,
그래서 더 쉽게 보낼 수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착각이었으므로.


다음은 '여름'과 '가을',
끝으로 '겨울'.
계절을 거슬러 지워나가는 일.
추억을 역순으로 정리하는 감정의 방식.

그리고 그즈음,
그 문장이 떠올랐다.


타는 건 창고인가, 감정인가?



그는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헛간을 태우다』.
거기서 남자는 말한다.
“나는 때때로 헛간을 태워요. 실제 헛간을요.”
그게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지금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화면 속 수치는 불처럼 움직였고,
그는 그것을 쳐다만 봤다.
저항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감정은 설명을 거치지 않고 사라진다.
불길처럼.


그는 안다.
자신이 태운 건 종목이 아니라,
기다림의 형태들이었다는 걸.
정리되지 못한 예감,
되돌릴 수 없는 감정,
복구를 포기한 청춘 같은 것들.


그래서 마지막까지
팔지 못한 종목이 있었다.


실패라기보단 잔류였다.
버릴 수 없었고,
계좌에 그대로 남았다.
심어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이름은 잊혔고,
남은 건 감정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파란 꽃’이라 부르기로 했다.


빨간불은 사라졌고,
그래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타지 않았다.


그 종목은, 손실이 커서 남은 게 아니었다.
신용으로 매수한 것이었고, 팔면 손에 쥐는 게 없었다.
계좌에선 살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산.


그것은,
남아 있지만 갖지 못하는 감정의 구조와 같았다.
버릴 수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그 어정쩡한 지점에
그의 감정도, 그 종목도 함께 떠 있었다.


그는 하루 한 번씩 그 파란 꽃을 들여다봤다.
변화 없는 차트,
조용한 음봉의 반복,
거기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지만
그는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 심장 한 켠이 아직
불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즈음,
그는 자주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얼굴 없는 얼굴이었다.
차분하고, 잘 말리고 다듬어진 정수리,
얇은 손가락,
창문 밖을 천천히 바라보는 눈동자.


그는 그에게 이름을 붙였다.
벤.


벤은 언제나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꽃은 결국 져요.”
“그러니 불태우는 것도 괜찮은 방식이죠.”
“미련은 남기지 말고, 손절은 망설이지 말고.”


벤은 차트를 보지 않았다.
그에게 수익률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단지
감정이 너무 오래된 것을,
자기 손으로 정리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벤을 흉내 낸 적이 있다.
차가운 손으로 매도 버튼을 눌렀고,
한 잔의 와인처럼
그 장면을 상상 속에서 음미했다.


하지만 벤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결국,
태우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금요일 오후 3시 28분.
계좌를 열자
그의 파란 꽃 중 하나가
빨간불을 켜고 있었다.


작은 수치.
정말, 티끌만 한 상승.
하지만 그는 손을 멈췄다.


팔지 않았다.


그건 회복도, 반등도 아니었다.
그저 감정이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징후였다.


그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파란불이 깜빡였다.


“이건…
지금은 멈추라는 신호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차트보다 자기감정을 믿고 싶었다.



지금도 그는 파란 꽃을 재배하고 있다.
물을 주지도 않고,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건 여전히 계좌 안에서 살아 있다.


그건 투자라고 할 수 없고,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낡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아직,
타지 않은 감정이다.


지워지지 않았고,
계산되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았다.


이사한 집, 새로 바른 벽지,
정리된 신용카드 잔액 아래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그 파란 꽃.


그는 언젠가 그 꽃이
스스로 지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의 손이 아니라,
계절의 시간으로.


그때가 되면,
그는 정말로
벤을 떠나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불은 사라졌다.

하지만 감정은,
아직 거기 남아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라지는 법에 대하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