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3부작 - 사랑, 일, 만남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옆자리는 수년째 비어있고
식탁에는 혼자 먹을 토스트 한 조각
식어가는 인스턴트커피
창밖으로 보이는 출근길 사람들
저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에게 기다림 받는 사람들일까
나는 오늘도 작업실로 향한다
짝사랑과 외사랑
모두 혼자만의 사랑이란 점에서는 같지만
그 아픔의 결이 다르다
1단계: 설렘
짝사랑은 아직 던지지 않은 주사위를 쥐고
그 무게만으로 가슴 졸이는 것
가능성이라는 달콤한 독에 취해
매일 밤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것
2단계: 두려움
주사위를 던지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주머니 깊숙이 숨겨둔 채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미루고 미루는 것
3단계: 좌절
외사랑은 이미 던져서 나온
주사위의 값이 실망스럽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시 던질 용기를 내는 것
4단계: 체념
실패를 알면서도 계속 게임을 하는 것
아니,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외사랑이 더 아프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질문을 던지는 마음이기 때문에
뜬금없이 던지는 사랑타령이라고?
아니다, 그건 아냐!
5단계: 전치(轉置)
이건 일에 대한 이야기야
외사랑을 일에 대한 경애로 치환하는 것
사랑할 수 없으면 일이라도 사랑해 보려는
비겁한 도피
작업실 안 쌓인 서류들
끝나지 않는 수정 요청들
"가격 좀 더 깎아주세요"
"디자인이 너무 복잡해요, 더 심플하게"
"다른 업체는 반값에 해준다던데요"
2019년 한국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디자이너가 된 시대
"우리 조카가 포토샵 잘하는데 그냥 시킬까 봐요"
"SNS 템플릿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매일 만나는 클라이언트들의
쉽게 던져지는 악의
내용보다는 오로지 가격으로만 승부하는 이 바닥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며 살다 보니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은 회의가 든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외사랑이다
받아주지 않는 일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
20대의 나:
사랑에도 길이 있고
일에도 길이 있을 거라 믿었다
모든 길은 어딘가로 통한다고
모든 노력은 보상받는다고
30대의 나: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길 같은 건 없었나 싶었다
그래도 계속 걸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40대의 나: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걷는다는 것 자체가
길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50대의 지금:
혹시 당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에서는
새로운 길이 시작될 수 있을까?
가장 두려운 건
당신과 나의 길이 다른 것도
우리의 길이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닌
애초에 내 마음에 길 같은 게 없는 것
6단계: 받아들임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길을 모르더라도 묵묵히 걸어가는
그 자체만으로 지금은 충분해
30년을 살아오면서
한눈팔기도 있었고
엇나간 길도 있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있었는데
당신은 이미 그 사랑을 끝냈다는 사실
그냥 조금 슬프다
하지만 이제는 원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