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3. 살인과 인연 사이에서 3"/3

고독 3부작 - 사랑, 일, 만남

E03. 살인과 인연 사이에서


범죄소설 속 깨달음


경계에서 호기심으로


『한낮의 방문객』을 읽다가

뜬금없이 떠오른 시 한 편


처음에는 이상했다

범죄소설 속 '살인'과

서정시 속 '인연'이

왜 같은 순간에 떠올랐을까?


내 정신세계를 의심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혹시 내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연결점의 발견


하지만 며칠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살인도 만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

가장 극단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만남




그렇다면 일상의 모든 만남은

얼마나 소중? 한 것인가


사람이 온다는 것의 무게


20대의 이해:


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이 오는 것이다


젊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예쁜 말이구나, 했다

로맨틱한 표현이구나, 했다


50대의 이해: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정말로 그의 모든 역사가 오는 것이라는 걸


그의 어린 시절의 상처

첫사랑의 아픔

IMF 때의 실직 경험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

부모님 건강 걱정

자녀 교육비 부담

집값 상승에 대한 초조함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오는 것


무게의 발견


이런 걸 연륜이라고 하나

알고 나니 더 이상 그 시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무겁기 때문에


알고 나면 못하는 게 많아진다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그에 따른 책임도 무거워진다


예전에는 가볍게 만나고 헤어졌는데

이제는 한 번 만나는 것도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 점을 찍는 만남들


시간의 무게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만나는 것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이 오는 것


어제 카페에서 만난 클라이언트

겉으로는 까다롭게 굴었지만

자세히 보니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도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다


오늘 만난 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기록될 한 시간이고

그의 인생에서도 영원한 한 시간이다


지우려 해도, 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소중한


연민으로의 전환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만나는 모든 인연은

서로의 인생에 소중한 한 획을

한 점을 찍는 일이다


나는 그 누구의 삶에

어떤 획을 긋고 있을까?


예전에는 화만 났다

"왜 이렇게 까다롭지?"

"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이제는 생각한다

"저 사람도 힘들겠구나"

"저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겠구나"


굵은 화살표를 그어주고 있을까,

아니면 먹칠을 하고 있을까?

최소한 먹칠은 하지 말자


환대라는 구원


바람의 더듬이


내 마음이 바람의 더듬이가 되어

그의 갈피를 더듬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상처와 고통과 절망을 만나는 것

내가 바람이 되어

그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때

그는 구원을, 나는 환대를 얻는다


일상 속 작은 환대들


어제 스타벅스에서:

계산대에서 적립 포인트를 확인하느라 줄을 막는 손님

예전에는 뒤에서 "빨리 좀"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저 사람도 몇 백 원이라도 아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오늘 지하철 9호선에서:

피곤해 보이는 대리기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가 깜빡 졸며 지은 안도의 표정

그 순간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평화의 발견


무거운 내 짐도 버거운 삶이지만

그의 일생이 옴으로

나의 일생을 보냄으로

평화로운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외사랑으로 시작된 이 긴 여행이

고독이라는 심해를 거쳐

환대라는 해변에 도착했다


오늘도 많은 이의 일생이 오고 간다

내 삶에 한 점을 찍어주는

평화로운 하루이기를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석양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내일 만날 사람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


2019년 1월 23일의 밤

5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아직 사랑할 것이 많다



2019.01.23. hyojoon
고독한 겨울밤, 작업실에서


하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마음으로
50대 초반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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