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단상: 시즌2 ② ― 계단실의 기억』

_수직의 시간

『퇴근길 단상: 시즌2 ② ― 계단실의 기억』

― 수직의 시간



퇴근길, 나는 오늘도 계단을 탔다.

승강기가 멈춰 선 5층짜리 건물,

현관을 지나면 오른쪽에 얕은 층계가 있다.

그 계단은 오래돼서

중간마다 약간씩 기울어져 있고,

손잡이는 사람의 손바닥 크기보다 얇다.



그런 계단을 오르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하중이 발끝에 고이고,

숨은 턱 밑에서 한 박자씩 울린다.

엘리베이터에선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수직의 거리라는 건,

사실 시간의 누적이기도 하다.



설계를 하던 시절,

나는 ‘계단’이라는 공간을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차를 맞추고, 최소 폭을 확보하고,

계단참에 채광창을 넣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 공간은 늘 “이동”에만 쓰였고,

머무는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낀다.

사람은 계단에서 멈춘다.

누군가의 문 앞에,

도중에 멈춘 전화 통화에,

무거운 발소리에 의해.

그 짧은 멈춤이 쌓여

계단은 기억이 되는 구조가 된다.



어느 다가구 주택의 설계에서,

나는 실수처럼 계단참을 넓혀두었다.

계단실 한쪽 벽에 조그만 의자가 놓였고,

그 위엔 화분이 올라왔다.

입주자 중 한 노인은 그곳에 매일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보다 더 집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도면을 다시 봤다.

어느 것도 의도된 것이 없었다.

계단참의 폭은 시공 편의를 위해 더 넓어졌고,

창은 그냥 반복된 패턴대로 뚫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비의도적 여백이

한 사람의 감정을 담았다.

그때 처음으로,

공간은 수직이 아니라 기억으로 층을 쌓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퇴근길,

나는 간혹 계단을 셈한다.

몇 층인지보다,

그 층에서 무엇을 떠올리는지가 중요하다.

3층은 누군가 떠났던 날,

2층은 빵굽는 냄새가 났던 날,

4층은 내가 고개를 숙였던 순간이 있었다.



계단은 구조적으로 단순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가장 밀도 높은 동선이다.

오르내리는 걸음마다

무언가가 남고,

무언가가 사라진다.



요즘 내가 쓰는 글에도

계단 같은 구조가 있었으면 한다.

읽는 사람마다

어느 문단에선 멈추고,

어느 문장에서 한 계단 내려앉기를.

그래서 한 호흡 늦게,

조금 더 천천히 내려가기를.



설계자로서 나는

계단의 디딤판 높이를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문장의 리듬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둘은 생각보다 닮았다.

빨라지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결국

다시 올라설 수 있도록.



계단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 구조다.

하지만 모든 곳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기억은 언제나

계단에서 다시 시작된다.





2025.06.16.


한 칸, 또 한 칸.

기억을 따라 내려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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