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단상: 시즌2 ⑤ ― 환기구의 존재』

_말하지 않은 구조

『퇴근길 단상: 시즌2 ⑤ ― 환기구의 존재』

― 말하지 않은 구조



퇴근길, 오래된 공공건물 옆을 지난다.


그 건물 외벽엔 정사각형 철망으로 덮인

작은 환기구가 줄지어 뚫려 있다.

열기도, 냄새도, 묵은 공기도

그 구멍을 통해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면

괜히 숨을 한 번 들이마신다.


그 안엔 누군가 하루 종일 참고 있었던 말들이,

입 밖에 내지 못한 감정들이

공기처럼 섞여 있을 것 같아서.



건축에서 환기구는

설비 도면의 부속 구조다.


메인 구조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 없이는 공간이 버티지 못한다.


공기는 반드시 흐르고,

흐르지 못하면 공간은 곧 썩는다.



어느 오피스텔 설계에서

나는 환기구 위치를 바꾼 적이 있다.


한쪽 벽면을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배관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시공은 수월했지만,

그 방은 이상하게 눅눅했다.


결국 입주자 민원이 들어왔고,

환기구를 다시 뚫었다.



그때 알았다.


보이지 않는 통로가 공간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것.

눈에 보이는 벽보다,

눈에 띄지 않는 숨구멍이

사람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다는 걸.



퇴근길의 도시엔

이런 숨구멍이 많다.


누군가 잠시 기대는 골목 끝의 담벼락,

계단참 끝 창문 위 조그마한 틈,

벽면을 타고 흐르는 오래된 환기팬 소리.



그건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의 구조다.

감정도 그렇다.


가끔은 직접 말하는 것보다

그저 어딘가 흘려보내는 것이

관계를 더 오래 지속시킨다.



나는 어떤 사람과

한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어쩐지

그와의 관계가 사라졌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대화는 없었지만,

우리 사이엔

작은 환기구 하나쯤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감정은

조용히 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쓸 때,

나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을 둔다.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모든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그저 한 구절쯤은

공기처럼 흐르도록 남겨둔다.


그 구절은 환기구 같다.

독자가 스스로 해석하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괜찮게 남겨두는 통로.



침묵에도 구조가 있다.


그 구조는 때로

말보다 더 많이 전달한다.


벽은 막지만,

환기구는 흐르게 한다.



사람도, 관계도,

말하지 않지만 흐르는 구조를 가질 수 있다.


그게 가능하려면

설계자가 그 공간을 믿어야 한다.


숨을 참는 게 아니라,

숨을 나누는 구조를 상상해야 한다.



퇴근길,

나는 조용한 건물 옆을 지난다.


환기구 하나 없는 매끈한 파사드.

그런 건물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조용히 통할 수 있는 구조.


그것이 우리가 남겨야 할 감정의 설계다.





2025.06.19.


말 없는 구조 옆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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