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이야기 #. 15
혼자 아이들을 키운 지 십 년이 되었다.
고단한 퇴근길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서 부랴부랴 아이들 저녁을 해먹이고 집안 살림을 하던 까마득한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아이들이 뚝딱뚝딱 저녁밥을 지어놓고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렸다가 함께 숟가락을 드는 일상이 찾아왔다.
"역시 우리 집은 계란 프라이 맛집이야. 엄마는 네가 하는 게 제일 맛있어!"
엄지 척을 날려주면 아이는 계란 하나 가지고도 스크램블, 계란 지단, 계란말이를 만들어냈다.
아주 어릴 때도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하겠다고 발판을 딛고 올라가 까치발을 하고 그릇을 씻던 아이였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땐 엄마의 퇴근보다 일찍 집에 오는 아이들이 불안해 공부방, 학원을 열심히 뺑뺑이 돌렸다. 혼자 키우는 아이들이 공부도 못하고 성적으로 학교에서 왕따가 될까 봐 조바심 나는 것도 있었지만, 성적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혼자 있지 않는'것이었다.
직장에 나가는 나를 대신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섬에 살 때, 인근 해병대에서 포사격 훈련이 있었다. 미리 방송을 통해 대피소로 이동해있으라는 안내가 있었지만 그날따라 작은 아이는 방송을 듣지 못했는지 집에 혼자 있었다.
포사격이 시작되고 천지를 울리는 대포소리가 섬에 울렸다.
당연히 대피소에 친구들과 있어야 할 아이가 집에서 울며불며 전화를 했다.
8살이었다. 극도의 공포였을 것이다.
"아가, 훈련이야. 이건 그냥 군인 삼촌들이 하는 훈련이야. 엄마 목소리 들려? 들리지?"
아이는 공포에 질려 울었고 포사격 훈련이 끝날 때까지 전쟁터에서 오고 가는 무전기 통신처럼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아이를 진정시켜야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목소리라도 들려줘야 했다.
포사격 소리가 커질수록 내 심장도 몇 번이고 같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없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집에 남아있는 상황은 늘 조마조마했다.
낯선 동네에서 아이들의 보호자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강제로 다니게 했던 학원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고 나서 나는 선언했다.
"이제 학원은 싫으면 다니지 마."
아이들은 좋아라 했다. 엄마 눈치 보며 다녔던 학원이라 불만도 많았을 것이다.
"대신, 이제 학원 다니고 싶으면 엄마를 설득해. 왜 무엇 때문에 어떤 학원을 다닐 건지. 엄마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학원비를 기꺼이 줄게. 하지만 그냥 시간 때우기 식으로 다니는 학원이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우리 빵사먹고 고기 사 먹자. 그게 더 낫겠어."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신나게 집에서 쉬었다.
"엄마! 내 친구 성적 떨어졌다고 친구 엄마가 핸드폰 뺏었대. 진짜 그 집에서 살면 힘들겠어. 우리 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엄마는 내 성적표 안 봐? 내 친구는 성적표 받았는데 울었어. 집에 가면 엄마한테 혼난다고."
성적표를 가져오면 점수는 보지 않았다.
아이들 시험이 있었던 날 저녁이면 식탁에서 우리는 그날 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이미 나누었기 때문이다.
"엄마, 나 오늘 수학 38점 맞았잖아."
"우와. 무려 20이나 오른 거야? 대박. 너처럼 20점 올린 친구 없을 걸? 진짜 너 노력했구나~~!"
언니의 성적 공개에 동생은 이미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엄마! 내 친구는 오늘 95점이 나왔다고 책상에 엎드려서 울었어. 난 이해가 안 돼. 왜 울지? 나는 이번에 70점 맞아도 엄마가 잘했다고 했는데.
지난번에 언니 수학 점수 나왔을 때도 엄마가 잘했다고, 떡볶이 파티했잖아."
작은 아이도 그렇게 친구의 부모님들이 성적에 반응하는 모습들을 실시간으로 알려왔다.
나는 안다.
숫자에 약한 나를 닮아서 아이가 수학 성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을.
아이는 점수 100점이 아니라 '지난 시험보다 나아진 점수'를 원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미안하기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 내 아이의 끙끙대는 뒷모습을 보았는데 성적이 좋은 남의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해서 무엇하겠는가.
성적표에 숫자로만 적힌 점수 말고 선생님이 써주시는 아이에 대한 의견이 중요했다.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는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냈는지, 배려하며 생활하는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는지가 궁금했다.
아이가 한 학년을 마치는 겨울방학식이 되면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 바쁜 저를 대신해서 아이를 1년 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아이지만 선생님이 키워주신 것이나 다름없어요.
덕분에 아이가 행복하게 잘 생활하고 건강하게 다음 학년 올라갑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담임선생님은 생각보다 어린것 같았던 우리 아이가 오히려 의지가 되었다고 하셨다.
아이에게 학원 선생님이든 학교 선생님이든 잠시라도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껜 꼭 인사를 드리고 헤어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유롭게 풀어놓으니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했다.
"엄마. 이 과목은 아무래도 학원 가서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
"왜? 학원 그렇게 싫어하더니?"
"응. 그런데 학교 가보니까 이건 아닌 것 같아. 어느 정도 따라는 가야지."
학년이 올라갈수록 큰아이는 어려워지는 학교 공부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왜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영어유치원을 나오고 과외가 일상이었던 친구들 사이에서 애쓰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딸~ 학교에서 줄넘기 잘하는 친구 있지? 그림 잘 그리는 친구 있지?. 그 친구들은 그쪽에 재능이 있다고 하는 거야. 남들보다 그 분야에 '재능'이란 게 있는 거지. 공부도 마찬가지야. 국영수를 잘하는 친구들도 그게 '공부 재능'인 거야. 네가 그 친구들보다 국영수 성적이 못하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넌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잘하잖아. 사람은 누구나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분야가 있는 거야."
6학년이었던 작은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대신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노래를 잘하고 싶다고 보컬 지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친구들은 중학교 학업을 준비하는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 등 분주했다.
아이 혼자 버스를 타고 보컬학원을 몇 달 나가더니 스스로 아니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엄마. 다녀보니까 알겠어. 그냥 안 다닐래. 경험해봤으니까 된 것 같아."
국영수보다 아이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선택에 전적으로 맡겼지만 사실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잦은 이사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겨온 나로서는 친구도, 가까이에서 조언을 구할 대상도 없었다.
나 혼자 판단하고 나 혼자 결정해줘야 하던 시간들이 지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는 그냥 참고할 정도로만 엄마의 의견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판단은 아이들이 하게 했다.
실패도 배움이고
잘 되지 않았을 때 그 이유를 다시 떠올려보는 시간들도 배움이고
내게 맞는 무언가를 찾는 과정도 결국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이 1등, 2등 하지 못하는 성적이 부끄럽지 않다.
아이들 보기에 우리 엄마가 삶을 열심히 살지 않는 엄마로 보일까 그게 부끄러울 뿐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면 내가 공부를 하면 된다.
독서를 강요할 시간에 내가 책을 읽으면 된다.
아이가 멋지게 악기 하나쯤 연주하는 것을 바라지 말고, 엄마가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아이들이 군것질을 적게 하고 야채를 먹고, 운동을 하며 건강한 육체를 가지길 원한다면
엄마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몸을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안 피곤해? 매일 새벽에 그렇게 운동하러 나가는 거?"
"TV 좀 봐 엄마, 요즘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이렇게 쌓아놓은 책들도 많은데 또 책 샀어? 책상 주변이 온통 책, 책이야 엄마."
아이들은 엄마가 윗집 아랫집 아줌마들과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연속극 하는 시간에 거실에 앉아 TV를 사수하는 엄마도 아니었다.
공부해라, 책 읽어라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엄마도 아니었다.
내 삶의 주인이 나이듯, 아이들의 삶도 결국 아이들 것이다.
그 백지에 나의 욕심이나 내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 곁에 와준 것만으로도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내 삶에 목적을 주었고
나를 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