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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27. 2020

아이의 반성문: 필통 안에 빨간 색연필이 없습니다

이혼 후 이야기 #. 16

전남편이 뜬금없이 문자를 보냈다.

당분간 애들 나하고 있으면 안 될까?
여기서 학업 시키며 내가 돌보고 싶어!
당연히 당신이 데리고 가는 게 좋을 듯 하지만 애들이 거기에서 적응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 보내요.

오해하지 말고 그냥 내가 돌보고 싶어서 그래요.
당신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할게 당신 생각을 묻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요.
그냥 애들을 위해 조금만 생각하자는 거야.

평소답지 않게 예의 바른 존댓말까지 쓰며 아이들을 자신이 키우고 싶다고 슬금슬금 내 반응을 살폈다.

남편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같이 살던 여자가 아이를 두고 나가버렸고, 전남편은 어쩔 수 없이 휴직을 신청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휴직수당보다는 출근해서 받는 월급이 더 많을 것이니 가정어린이집에라도 맡기면 생활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퇴근 후 내 시간 없이 아이를 다시 찾아와 육아와 가사를 이어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도 그렇게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휴직을 신청하고 돌도 안된 아이를 종일반에 보내면서도 아빠는 집에 있다고 아이들이 말했다. 젖먹이를 아직은 어린이집에 보낼 때가 아니니 하루 종일 끼고 돌보는 줄 알았다.


여자가 나가고 나자, 전남편은 우리 아이들을 자주 편하게 불렀다. 

아이들은 아기도 구경할 겸 아빠를 보러 갔다. 


아빠네서 며칠 자고 오던 날, 아직 돌도 안된 갓난아이가 한밤중에  우는소리에 거실에 나가보니 아빠가 아기를 얼르며 서투른 손으로 분유를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큰아이가 한숨을 쉬며 젖병을 뺏었다.


"아빠 이리 줘, 내가 할게. 아기 얼른 달래. 기저귀 한번 확인해주고."

아빠 품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받아 안고 분유를 먹였다. 배가 부른 아기는 쌔근쌔근 잠들었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또래에 비해 집안일에 능숙했다.


어릴 때부터 작은 십자드라이버를 쥐어주고 장난감 건전지 정도는 교체할 수 있게 시켰었다.

여자, 남자를 구분하지 않고 

엄마처럼 비데 컨트롤 기판을 교체하거나 세면대 트랩을 분리해 청소하고, 급할 때 타이어 정도는 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길 바랬다.


여자들이 환호하는 '걸 크러쉬'는 짙은 스모키 화장만 하고 당당히 걷거나 남자들을 이겨먹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내 할 일부터 하는 것. 그래서 그들과 같이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혼자 키우면서 오냐오냐하며 모든 것을 해주지 않았다.

공동 공간은 함께 청소하고 함께 사용한다고 가르쳤다. 

집안 대청소를 할 때도 구역을 분담해주었고, 자기 방은 무조건 스스로 청소하게 했다.


함께 타는 내 차도 같이 세차를 했다.

아이들에게 세차 건을 두 손으로 잘 잡는 방법, 브러시를 쓰는 방법, 동전 바꾸는 방법, 세차하는 순서를 가르쳤다.


쓰레기 분리수거, 빨래 개기, 건전지 교체하기 등 간단한 집안일은 엄마가 없어도 할 줄 알도록 가르쳤다. 여자라서 못하는 일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밥을 하고 간단하게 반찬을 만들고 간식을 만들어 먹을 줄 알았다.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를 쓰는 방법과 칼을 다루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엄마가 일을 다니니까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이 늦게 끝나거나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아이들이 밥이라도 챙겨 먹기를 바랐다. 

굶지 않기를 바랐다.

웬만한 집안일은 거뜬히 해내는 아이들이었다.



전남편에게는 그렇게 자신보다 익숙하게 집안일을 할 줄 아는 손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들을 맡아 키우면 나에게 매달 보내는 양육비도 주지 않아도 될 것이며, 덤으로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짠하고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매일 씻겨줘야 하고 놀아줘야 하고 동화책을 읽어줘야 하는 고된(?) 육아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힘들다고 했으면 나는 인간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십 년 동안 걱정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엄마와 이사 다니느라 아이들 적응이 힘들 거라고 걱정하는 척했다.


'애들을 위해서'라며 조금만 생각해보자고 했다.


애들을 위해서....

빤히 들여다보이는 상대방의 패를 보고 있을 때 그 한심함은.... 그것도 아이들의 아빠라는 사람이 한다는 말은 나를 쓴웃음 짓게 만들었다.


문자에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춘기 딸들을 그런 환경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을 생각을 하는지... 

대답할 가치가 있어야 분노를 덕지덕지 붙여 답장을 할 텐데, 너무도 어이없는 제안에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디 공짜로 큰 줄 아는가.

내 아이들이 편안한 집에서 행복하게만 잘 자란 줄 아는가.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던 아이들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엄마로서 직장일과 아이들 키우기를 완벽하게 하고자 했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많았다.


숙제 검사, 

알림장 확인, 

준비물 챙기기, 

아이들 학교생활 이야기 들어주기

빨간 색연필을 챙겨주지 못한 날이었다


아이가 색연필을 가져오지 않아서 했던 숙제가 내 마음에 콕콕 박혔다. 

나더러 하는 소리 같았다. 뭐하는 엄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아이 알림장에서 준비물을 알게 될 때면 화가 났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짜증을 아이에게 퍼부을 때도 많았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이 세상의 전부였을텐데, 그런 내가 화를 냈다. 

아이를 혼냈다.


작은 아이도 학교에 들어가자 알림장 확인과 숙제 확인은 두배가 되었다.

저학년 아이들의 숙제는 대부분 엄마 숙제였다.

되도록이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맡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늘 시간이 부족했다.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거나 숙제를 안 해오는 날에는 벌칙 숙제를 했는데, 엄마가 짜증을 낼까 봐 언제부터인가 숨기는 것 같았다. 엄마가 정신없어서 부족해서 못 챙겨준 건데 아이는 선생님과 엄마,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끔 노트를 보다가 발견하는 아이 숙제는 '엄마가 대체 왜 있는 거지?'라는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학예발표회든 운동회든 아빠가 필요한 순서에도 내가 나갔다.

창피한 것은 둘째이고, 아이가 주눅 들지 않았으면 했다.

친구들 아빠처럼 힘세고 빠르지 않아서, 멋있지 않아서 미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에게 너무너무 미안한 이야기지만

몸까지 아파올 때는 아이들이 짐 같았다.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집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엄마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숨 막혔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도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아이들이 말끔해졌고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얼굴에 함박웃음꽃이 피었다.


그걸 아니까 더 힘들었다.

멈추면 안 되는 쳇바퀴에서 목이 말라도 내려올 수 없었고 발이 부르터도, 어지러워도 내려올 수 없었다. 내려오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내게 삶이란 대체 뭐지?


끊임없는 물음이 쏟아졌다.


울고 싶었는데 울 공간이, 울 시간이 없었다.

직장에서 울 수도 집에서 울 수도 없었다.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퇴근시간, 사무실을 나와  회사 정문을 나가기 전 담장을 마주 보고 차를 세웠다.


이미 충혈된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꾹 다문 입술사이로 조금씩 삐져나오던 울음이 점점 커졌다.

이렇게 사는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아이들에게 좀 더 여유롭고 살갑지 못한 내가 미웠다.

너를 빨리 학교에 내려줘야 엄마도 출근한다고 밥 빨리 먹으라고 아이에게 쓴소리를 했던 그날 아침의 내가 미웠다.


'이제 다 컸으면서 이것도 못하니.'

라고 하다가 

'아직 쪼끄만 게 뭘 안다고 그래?.'

라고 말하는 모순덩어리 내가 미웠다.


예루살렘에 있다는 '통곡의 벽'앞에서처럼

회사 담벼락을 마주 보며 반성을, 슬픔을, 고통을 눈물과 함께 내뱉었다. 


시계를 봤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15분을 치열하게 울고 나서 마트에 갔다.

저녁 찬거리를 사서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저녁밥을 지었다.



밥을 해먹이고 애들을 재운 늦은 밤.

아이 숙제장을 검사하다가 나는 낮에 못 울었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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