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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05. 2020

"엄마. 나라도 아빠랑 못 살았을거야."

이혼 후 이야기 #. 21

"너희들을 아빠와 헤어져서 살게 한건 미안해. 엄마는 함께 살고 싶었는데 아빠가 싫다고 했어. 할머니랑 엄마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이야.


하지만 엄마는 아빠랑 떨어져 사는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아빠와 이혼한 이후에도 절대로 내 결정이 후회되지 않아.


엄마는 지금 이 생활이, 내 환경이 너무 좋아.

엄만... 이혼 잘한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늘 일기장에만 써오던 문장들이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힘주어하는 내 말이 차 안에 퍼졌다.


눈치 보며 못할 말도 아니었다.

아니 예전부터 그랬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스스로 아픔을 꺼내 보일 맷집이 없었다.

나름의 이유와 환경이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중심을 잡고 한치의 틈도 없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긴 장대를 들고 한 발 한 발 외줄 끝까지 무사히 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때 나는 외줄 위에 처음 서 보았고

그 밑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어린아이들이 등에 업혀있었다.

재주를 부리며 남들의 환호를 받을 때가 아니었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발바닥이 종아리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런 이유조차 내가 만들고 꽁꽁 쌓아 올린 담이겠지만

그땐 그것이 맞는 줄 알았다.

내가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그것이 맞다고 무섭도록 믿으며 살아야 했다.



조금 놓고 살아도 돼.
그렇게 애들에게 절절매며 눈치 보지 마.
야. 나 같으면 당당하게 말한다. 이혼에 뭐 보태줬냐고.
너가 죄지은 것도 아니잖아.

가까운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지만 야속했다.


그들은 내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었다.

나보다 인내심이 강했는지 아니면 행복했는지 모르지만

나처럼 이혼녀가 아니었다.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 나가야 한다는 전제가 없는 이들이었다.


남편에게 맞으며 끌려다니거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악담을 듣고 살거나

내 엄마 같은 쌀자루를 안고 울어보지도 않았다.


죄인 줄 알았다.

죄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낳고 엄마가 돼서 고작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자책으로 살았다.



"그래. 엄마 이혼했어. 그래서 싫으니?"

"네. 저 이혼했어요. 그래서 뭐 피해 준거 있어요?"


충고대로

보란 듯이 어깨 쫙 펴고 했어야 했던 말.


쓸 줄 모르는 말이라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혹시라도 달라질 '만약'이라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혼했다고 당차게 말해놓고 그 자리에서 입술을 바들바들 떨지 않을 용기가 없었다.


과감하게 혼자 산다고 뱉은 순간 주변 사람들에게 관찰 거리가 되는 '혼자 애들 키우는 젊은 여자'의 깡다구를 뽐낼 그릇이 되지 못했다.


"엄마. 내 친구 부모님한테 우리끼리만 사는 거 말 안 하면 안 돼요?"

전학을 자주 다니다 보니 좁은 동네에서는 직장 동료가 같은 반의 학부형이기도 했다. 직장에서 남편 없이 산다고 말하면 엄마의 동료를 통해 친구에게 전달될까 걱정하고 있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마'하고 약속해야 했다.


'당당하게 살자꾸나~'하며 아이가 밝히기 싫어하는 부분을 까발려놓고 아이들에게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으라는 말을 할 연사가 되지 못했다.


엄마 아빠의 결정으로 인해 아이들이 원치 않는 자신감을 갖게 할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이혼한 여자라는 타이틀을 용납할 마음의 단도리가 아직은 돼 있지 않았었다.


결국에는 맞아야 하지만 최대한 순서를 늦추고 싶은 독감주사 순번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에게 솔직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도 힘들었고

엄마도 사람이고

엄마도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엄마도 웃을 줄 알고 엄마도 너희들 앞에서 펑펑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가 무심한 듯 가볍게 흘린 질문에 툭하고 뭔가 마음의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후회하지 않아. 지금이 너무 행복해.


피곤했던 저녁

아이들이 좋아하는 자장면을 먹기 위해 40분을 달려서 가야 하는 중화요릿집을 다녀오면서 문득 꺼내게 된 '이혼'이란 단어를 시작으로


그렇게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나에게 가감 없는 마음을 글이 아닌 말로 꺼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엄마. 나라도 아빠랑 살기 힘들었을 거야.

그나저나 아빠랑은 왜 결혼한 거야? 좀 생각해보고 결혼하지."


아이는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생각 없이 왜 아빠랑 결혼했냐구~'

대답을 못하는 엄마를 놀리고 있었다.






십 년 된 차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 카시트와 보조 벨트를 달아서 태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시트 가득 꽉 차게 앉아서

"차 좀 바꿔요~"

라는 핀잔을 날리는 아이들이었다.


아직 지지 못한 석양의 끝이 먼 하늘 끝에 살짝 려 있었다.




엄마.

아빠가 사는 모습

엄마가 사는 모습을 보니 서로 안 맞았던 게 맞는 것 같아.


아빠는 매일 저녁 술을 먹고 아기가 있는데도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운동도 안 하고 이상한 유튜브 가짜 뉴스나 보면서 그걸 우리한테 자꾸 이야기해. 그리고 맞지도 않는 로또를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사.

로또 사는 돈이나 술, 담배 살 돈만 아껴도 아빠 벌써 부자 됐을 거야.


지난번에는 에버랜드 연간회원권을 끊자고 하더라.

아빠네 근처니까 우리 보고 자주 와서 놀고 가라고.


그래서 내가 '아빠가 연간회원권 끊어줘.'라고 말했는데 뭐라는 줄 알아?

'아빠는 돈 없어, 엄마한테 끊어달라고 해.'이러는 거야.

말이야 방귀야?


아빠는 매일 전화해서 우리 보고 오라고 해.

그렇게 보고 싶으면 아빠가 한 번쯤 여기 와도 되잖아.


그런데 말만 자꾸 오래.

우리가 가면서 힘든 건 생각 안 해?

자꾸 오라길래, 아빠가 차표라도 끊어달라고 했더니 또 돈이 없대.

엄마한테 끊어달라고 하래.

무슨 아빠가 그래?


집에 가만히 앉아서 전화로만 계속 오라가라야.

아빠가 차표를 준비해 놓고 부르거나 우리한테 와보지도 않으면서 매일 말만 해.

이제 고모도 아빠가 놀러 간다 하면 바쁘다고 오지 말래.


누나가 되가지고 왜 오지 말라고 하겠어?

고모도 이제 아빠가 귀찮은 거야. 괜히 오랬다가 아기 봐야 할까 봐 싫은 거지.

아빠는 애 맡겨놓고 신나게 술 마실게 뻔하니까.


매일 돈 없다면서 아빠는 할 건 다해.

휴직한다고 돈도 안 벌면서 애는 어린이집에 종일 맡기고 계속 집안에 있는 거야.

주위 사람들 힘든 거 생각 안 하고 아빠 혼자 '지 편한 세상'이야.

무슨 아파트냐구.


엄마가 그때 우리 데리고 나갔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엄마 혼자 가버리고 우리가 아빠네서 컸으면 결국 새엄마랑 살았을 거 아냐.

나는 진짜 그러면 가출했을 거야.

그게 집이냐구.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아빠에 대한 생각을 쏟아냈다.

엄마가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봐 왔던 아빠에 대한 평가였다.




아빠를 만나러 가는 횟수가 점점 뜸해졌다.

아빠네 가도 재미있는 것이 없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모는 혼자 애 키우며 사는 아빠에게 반찬을 해 나른다고 했다.


전남편은 오지 않는 아이들이 불안했는지

매일매일 전화를 다.

아이들은 아빠 전화를 귀찮아하기도 했다.



... 결국 세월이 벌줍니다




죽는 것보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더 힘들었던 그때,

상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의 아이들이 스스로 느낄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다.


나의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지 않기를 바랐고

내 감정이 아이들에게 물들지 않기를 원했다.


어느덧 아이들 곁에서

흰머리가 보이는

눈이 침침해지는

진 뱃살을 나잇살이라고 우기는 내가

보였다.


편안해 보였다.

 

삶이라는 연극무대 위에서

더는 긴장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서 있는

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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