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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넉넉 Sep 07. 2022

재재가 부러워

화요일 에세이

육아 중인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그들의 육아와 그에 따른 심리적 경험을 심층면접하고 분석해 연구에 옮긴 적이 있다. 한 참여자를 면접하던 중에 그녀가 자기 딸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우리 딸, 너는 좋겠다. 엄마 같은 엄마, 아빠 같은 아빠가 있어서.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의 엄마에게 ‘자기가 원하던’ 형태의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다며 회상한 바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사랑을 딸에게 주려고 남편과 이야기도 많이 하고 노력한다고. 자신들의 노력이 의식적이고 성실해서 그 노력에서 비롯된 사랑을 받는 딸이 때로 부럽다고. ‘당신이 원하던’ 형태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거 있잖아요. 굳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바라봐주고 안아주는 거요. 얼굴을 만져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 있잖아요. 뭔가 잘못하면 화부터 내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더라도 뭐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물어봐주는 거요. 항상 따뜻하게는 못해줘도 10번이면 적어도 2-3번 정도는 ‘아, 역시 우리 엄마는 내 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거. 그런 사랑 말이에요.     


그런 사랑.

그냥,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거...

굳이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엄마 손길, 엄마 눈길, 엄마 목소리, 엄마 품...     


차분한 그녀의 말에 그녀 자신도, 바로 앞에서 듣고 있던 나도 어쩐지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원했던’ 사랑은 ‘받지 못한’ 사랑과 어딘가 모습이 비슷해서 그녀의 이야기에 목울대가 아프게 삼켜졌다. 면접자로서 평정을 유지해야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렸고 내가 ‘원했던’ 사랑 또한 ‘받지 못한’ 형태의 사랑으로 남았다는 미련을 자극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주변에 묻히지 않도록 내가 눈물 흘린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다시 그녀의 이야기로 돌아가 집중했다.      


*


재재가 태어나기 전에 남편과 함께 박사과정 때의 지도교수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만삭의 내 배를 보시며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자네 같은 엄마에게서 나오는 아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계속 공부하고, 부모와의 아픈 관계를 연구하면서 돌아보고 자녀에게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엄마를 만나는 뿜뿜이(재재 태명)는 좋겠다. 남편도 다정하고, 이런 아빠는 얼마나 아이를 예쁘게 잘 키우겠나. 우리 때 부모님은 그저 사랑하고 위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자녀 키웠지. 상처받고 커서는 부모님을 위한다는 말로 도리어 상처를 주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랬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동의했다. 적절한 표현 방법을 잘 몰라 서툴렀던 우리 부모님의 서툰 사랑에 나는 분명 상처받은 것을. 나도 크면서 부모와 주고받았던 서툰 사랑을 부모에게 다시 상처 되는 말들로 돌려주었다는 것을. 그래도 공부하고 연습하고 노력해 내 자녀에게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주려하니 내 자녀는 나와는 다른 조금 더 밝고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 좋으리라는 것을.      


교수님과 담소를 나누고 만남이 마무리 지어질 때쯤, 교수님은 한탄 섞인 한 마디를 하셨다.     


나도 이런 부모 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번 생은 틀렸어.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어린 나날들로부터 시절이 많이 지났어도 ‘원하던’, 그리고 ‘받지 못한’ 사랑의 환상이 담긴 어린 시절은 언제나 미련처럼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같다.      


*


나와 남편도 자주 재재가 부럽다며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재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받았던 사랑의 어두운 측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기 때문이다. 상처, 강요, 위협, 경고, 끝없는 잔소리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는 재재에게 다른 형태로 돌려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편하고,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난하고, 뻔하더라도, 재재의 생각과 의견과 해석을 끝까지 듣고 재재의 발달단계별 눈높이에 맞춰 진지하게 반응하려 많은 순간 의식과 촉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나와 남편은 자주 질적이고 정중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서로 필요한 ‘양육공부’를 해야 한다.      


이 ‘양육공부’에는 아이의 발달단계별 부모역할, 아이 개별성과 성향을 존중하는 의사소통, 공감 능력, 문제해결능력, 민주적인 가정환경 조성, 우리가 어린 시절 우리 부모와 맺었던 관계 형태 등이 들어가 있다. 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아들 재재가 부러운 것이다. 우리가 ‘양육공부’를 있어서, 혹은 ‘양육공부’가 좋아서가 아니다. 반드시 꾸준히 해야 하는 공부이고 노력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던 사랑의 많은 모습들을 우리는 ‘발전’의 차원에서 우리 자녀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밝은 측면들은 잘 유지하되, 조금 더 발전된 형태로, 더 성숙하고 진정 어른다운 품격을 갖추려 노력한다.      


굳이, “애야, 이것이 사랑이란다. 얘야, 이것이 자신감이란다. 얘야, 이것이 엄마[아빠]가 너를 위해 기울이는 헌신이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는 모든 추상적 단어들을 재재가 온전히 몸으로 느끼도록 우리는 말과 몸으로 이야기한다. 기쁠 때, 슬플 때, 흥분할 때, 낙담할 때, 희망에 찰 때, 좌절할 때, 누군가 부러울 때, 화가 날 때... 부모된 우리는 존재감을 조금 낮추고 그저 재재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된다. 재재의 언어와 표정이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 여기면 된다.      


언젠가 재재가 좀 더 우리와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때 재재의 말을 들어봐야 우리가 부모로서 역할을 나름대로 잘 수행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부모로 둔 재재가 부럽다.   

  

*


재재는 세 돌이 될 무렵, ‘못 하는 말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의견을 차분히 말하게 되었다. 나와 남편이 하는 말에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엄마[아빠] 뭐라고? 다시 말해줘.”를, 이해가 되면 어떻게든 그 다음에 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재와 애정 표현(자주 껴안고 눈을 맞추고 “재재야”, “엄마아” 하며 곧잘 웃고 행복을 느끼곤 한다.)을 하던 중 내가 말했다.      


나: 엄마는 종종 재재가 부러워. 아니, 매일 매일 윤재가 부러워. 재재는 엄마, 아빠랑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엄마, 아빠 아들이라서. 엄마랑 아빠랑 매일 재재를 공부하니까. 그런 재재가 부러워. 엄마는 때로 진짜로 재재가 돼보고 싶어.
재재: 엄마, 그럼 내가 엄마 되고, 엄마가 재재 되게 해줄까?
나: 응! 어떻게?
재재: 엄마는 윤재 해, 지금부터.
나: 엥? ㅋㅋㅋㅋㅋㅋㅋㅋ
재재: 내가 엄마 되고, 엄마가 윤재 되고.     


눈물이 핑. 재재가 나와 남편에게 사랑을 준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어딘가에 ‘어른 버전 재재’가 존재한다면, 재재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는 좋겠다. 나를 아들로 둬서.”     


그러면 백 번, 천 번,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응. 엄마는 너무 좋아. 무지막지 행복해. 재재가 엄마 아들이라서. 재재는 엄마랑 아빠한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배울 것 가득한 선생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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