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1
six feet above라는 제목은 six feet under라는 관용구에서 따왔다. ‘six feet under’ 란 직역하면 땅에서 6피트 아래라는 뜻으로, 죽음 또는 매장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때 쓰인다. 1 feet는 대략 30cm 정도이다.
눈을 뜨니 천장이 보였고, 밖에 들리는 소리를 듣자 하니
나와 선율이 빼곤 모두가 일어나 있는 듯했다.
어제 고모한테 안녕히 주무세요도 못하고 자버렸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세수랑 양치질만 하고 고모께 아침 인사를 드려야지
생각하며 방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프리실라가
굿모닝! 인사를 했다.
어, 어어. 당황한 나는 인사에 답할 타이밍을 놓쳤고
프리실라는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뒤돌아서 프리실라를
좇아가 굿모닝을 하면 프리실라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며 당황할 것 같았다.
‘굿모닝’이라는 아침인사를 들으니 아, 여기 미국이었지 실감이 났다.
이 다음날부턴 나도 아침에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굿모닝을 빼먹지 않고 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굿모닝 하는 순간이 좋아졌다.
인사하기 직전까지 내 컨디션이 어땠느냐와는 별개로
굿모닝이라고 말하고, 굿모닝이라고 답을 들으면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는 새 페이지가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흰 종이를 보며 오늘은 어떤 하루로
채우게 될까 기대하는 마음.
비록,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굿모닝은 쏙 들어갔지만.
고모께 인사를 드린 후, 오늘의 일정을 전달받았다.
오전에는 고모부 추모공원에 갔다가 저녁에는 집에서 고모 생일파티를 한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선율이를 깨우고 나갈 준비를 했다.
가져온 옷 중에서 그나마 무채색인 것으로 골라 입었다.
거실로 나가니 고모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이미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검정모자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계셨다. 추모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들의 ‘멀지 않다’는 말은 고속도로를 타고 차로 30분이 걸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차의 뒷좌석에 실려 창밖을 구경했다.
이런 오렌지빛 바이브 안에선 슬퍼도 오래 울진 못하겠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오기 뻘쭘하겠어.
추모공원 안은 마치 양재시민의 숲이나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서울숲 어드메 같았다. 봉분은커녕 무릎 높이 정도의 작은 비석만 띄엄띄엄 눈에 띌 뿐이었다.
“여기 어디쯤이지 않았어?”
사촌들은 차를 천천히 운전하며 두리번거렸다.
기억 속 장례식 전경과 맞춰보는 듯했다. 그러다 낯익은 모양의 나무를 보고 고모부 묘지 자리를 알아냈다.
이렇게 위치를 찾는다고?
어리둥절한 채로 내렸는데 맞긴 맞았다.
나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더니 바닥에 누워있는 석판 세 개가 보였다. 그중 두 개는 다른 한 개와 좀 떨어진 곳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고모부의 부모님 묘지라고 했다.
이윽고 고모가 타고 있던 차도 도착했다.
친척들은 비석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모부를 왜 여기로 모셨어? 집이랑 가까워서?”
“아빠가 옛날에 여기 땅 사놓으셨어.”
유진이 대답했다. 뒤이어 고모께서 말씀하셨다.
“팔십몇 년도에 같은 교회 신도가 여기에 묫자리가 있는데 사두지 않겠냐고 해서 그때 샀지. 그리고 한국 가서 고모부가 부모님 시신을 화장해서 들고 와 여기에 묻으신 거지.”
이상한 말 같지만 교회가 없었으면 묫자리도 없었다.
교포의 삶에서 교회는 큰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구나. 고모네 가족 모두 크리스천이고, 고모부도 살아생전 한 교회에서 높은 지위까지 오르셨었다.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땐 사십 불인가 주고 샀는데 지금은 땅이 많이 없어서
사천 불을 줘도 못 사. 그리고 뚱뚱하면 돈 더 내야 해.
땅이 더 넓어야 하니까.”
왓?
아, 여긴 화장을 안 하는구나. 그대로 묻는구나.
땅이 넓으니 땅이 좁은 한국과 장례문화가 다를 수밖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