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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Oct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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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영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진심으로 좋아한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첫눈에 흥미가 동해 시작했던 것들은 많았다. 그것들은 대개 남들이 들으면 사회의 통념에 뒤떨어져 있거나 멋을 부린다고 여길 만한 것들이었다. 고전 소설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들으러 LP 바에 간다든지 하는 것처럼. 하지만 막상 그것들에 본격적으로 몰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권태를 느끼고 그만두곤 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선 이상으로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 거의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나에 정신을 빼앗긴 채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이 삶 전체를 집어삼키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정작 그런 시기가 올 때마다 늘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나타나 가로막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쯤에는 좋아했던 것을 왜 좋아했는지조차 기억에서 잊어버린 뒤였기 때문에 끝내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평일에는 건설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아침부터 단골 카페로 가서 글을 썼다. 소설 쓰기는 최근에 그가 새로 시작한 취미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설은커녕 글 자체가 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그를 우울증이 있는 작가로 만들었고, 사실과 가상을 적절하게 섞은 글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쓰이고 있었다. 그는 작업이 끝나면 당장 열리고 있는 아무 공모전에나 투고할 생각이었다.

단골 카페는 연희동에 있는 곳으로,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을 가서 내린 뒤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선간판이 보였다. 그 아래에 계단이 있고 벽에는 카페 이름이 디자인된 포스터가 가득 붙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인센스 스틱 향이 은은하게 풍겼는데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안은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띠었다.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것 같은, 걸음이 날 때마다 빠득거리는 소리, 어둑한 조명이 마치 조심스러운 장소에 몰래 숨어들어온 듯했다. 주영은 커피를 주문하고 가장 구석에 있는 네모난 테이블에 앉았다. 작업하러 오면 늘 앉는 자리였다. 등 뒤에서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밑에 있는 스피커에서 로파이 재즈가 흘러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말소리도 더 커졌다. 주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잔을 들었다. 한참 전에 미지근해진 커피는 쓰기만 했다. 불현듯 모니터에 떠있는 글자들이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이 공간과, 다양한 형태로 옥죄고 있는 장치들, 옷과 체면 같은 것들, 모든 사물이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대신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것이야말로 행복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바로 이거야’ 그리고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무언갈 시작할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끝났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싫증 나서 몸부림칠 정도라니. 자신은 사실 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글을 쓴다는 의식 혹은 남에게 보일 이미지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때 문이 발칵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머리와 어깨가 잔뜩 젖은 채였다. 주영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비가 그칠 때까지는 속절없이 여기 앉아 있어야 하니 말이다. 카운터 앞에 선 여자는 얼굴에 엉겨붙은 머리를 떼어내면서 말하고 있었다. 어느샌가 소란은 잦아들고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에 든 생각은 온데간데없었다. 소나기 때문인지, 시선을 잡아당긴 여자 때문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싫증 또한 일순간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른다. 두어 문장을 쓰고 나서 테이블 맞은편에 누군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 여자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꾹 쥐어짜면 물기가 새나올 것 같았고 얼굴은 질린 것처럼 새하얬다. 그리고 조금 숨을 몰아쉰 뒤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인간의 보금자리에 처음 들어온 야생동물 같았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커피를 홀짝이며 읽기 시작했다. 주영은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손가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이곳에서 각자 글을 탐구한다는 것에서 미약한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별안간 유리 깨지는 소리와 낮은 비명이 카페 안을 울렸다. 바닥에는 잔이 산산조각이나 흩뿌려져 있었고 오렌지색 액체가 바닥에 퍼지고 있었다. 그녀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다가 눈이 마주쳤다. 미소 짓는 것 같은 눈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범인은 어쩔줄 모르면서도 자신의 옷과 몸에 묻지는 않았는지 곁눈질하고 있었고, 직원이 걸어와 유리 조각을 줍고 바닥을 닦았다. 주영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조금 전에 마주쳤던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주 한가운데를 유영하는 듯한 멍한 눈빛.

“만날 때마다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네요.”

그 말을 얼마나 은밀하게 속삭였는지, 주영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더구나 요즘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말 거는 것은 금기시되는 풍조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영은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기억 안 나세요? 그때도 여기에 앉았잖아요.”

그녀는 공중으로 집게손가락을 들어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그는 말뜻을 이해했다. 파도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도 똑같이 이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았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때와는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지금처럼 잔을 떨어트리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왁자지껄한 파티에서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신기한데요. 오늘도 마침 이렇게 만났을 때 잔이 깨졌고요….”

그녀는 책을 내려놓았지만 덮지는 않았다. 둘은 카페의 분위기와 음악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잠시 곁눈질로 사고 현장을 보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만 책을 읽어요. 이곳 분위기가 좋거든요. 집에서는 집중이 안 돼서요.”

주영은 아까 느꼈던 동지애가 자신의 공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는 여자에게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았고, 그녀는 책을 들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에세이였다. 그는 관심 있는 척 책을 받아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행복과 위로에 관한 에세이였다. 매일 수거한 감정 부스러기들을 잘 펴서 글로 옮겨놓은.

그녀가 덧붙였다.

“계절이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든요. 재미있는 일은 보통 날씨가 극적일 때 일어나잖아요.”

“제 생각에는, 특히 비가 올 때 많이 일어나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헛기침하고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친구인 것 같았고 이 근처에서 길을 헤매는 듯 보였다. 그녀는 길을 알려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건네받은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주영은 모니터를 쳐다보고 타자를 쳤지만, 윗줄과 똑같은 문장을 쓴 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은 뒤 아무 말 없이 책을 펼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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