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난 뒤에 주영은 퇴근하고 다시 카페를 찾았고, 단골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 이곳의 분위기가 이전과 다름을 느꼈다.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았다. 이 카페를 수많은 톱니바퀴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로 비유한다면, 톱니바퀴란 입구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부터 테이블을 비추는 조명까지 모든 요소를 가리켰다. 그중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주영은 모든 것을 생각해본 뒤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없어선 안 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중해서 글을 쓰다가도 그는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입구를 힐금거렸다. 대부분이 헛수고였다. 다음 날 저녁이 돼서야 그녀가 들어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을 때면 입술을 오므린 채로 앞으로 내미는 습관이 있었는데, 깊이 빠져들수록 입을 더 길게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주영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숨을 돌릴 때마다 모니터 너머로 그녀를 몰래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얼간이가 다시 유리잔을 박살 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 주 동안, 가끔 눈이 마주쳐서 멋쩍게 웃은 적은 있어도 그녀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더는 유리잔이 깨지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 뜻도 없었던 걸까? 그녀에게 있을 수많은 재미있는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일까?
다행인 건 그녀는 꽤 이 카페를 사랑하는 듯했고 이틀 혹은 사흘씩 틈을 두고 꾸준히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고르는 비엔나커피인지, 아니면 저번에 했던 말대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그는 시간을 두고 그녀를 계속 마주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자신이 말을 걸면 어느 쪽으로든 금방 끝날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거절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제의에 대한 섣부른 승낙, 혹은 그에 대한 잠재적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였다. 얼마 전 그녀가 주었던 신호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주영의 마음에 머물고 있었다. 멀어지는 순간 그것은 건조함에 말라비틀어질 것이고, 가까워지는 즉시 그는 애정의 무게를 못 이기고 쓰러질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확실한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떠올리면 애욕이 솟구치다가도 그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고 요동치는 감정을 적정선으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불행한 소식이었다. 그녀가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동안은 그들은 분노에 찰 맥락에서 물러터진 말만 반복하고, 환희에 가득 찰 때는 축 처져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 일요일,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공모전 마감일이 점점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카페에 남아있었다. 그녀가 친구와 함께 들어왔다. 새까만 눈이 재빨리 안을 훑었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웃을 듯하다 멈칫하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주영은 강박적으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조금 뒤 맞은편에 그녀와 친구가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말소리가 향수처럼 테이블 위를 떠다녔다. 카페 안이 조금이라도 조용해지면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와 꽂혔고, 간혹 부드러운 목소리로 ‘난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나 ‘질질 끄는 건 피곤해’ 라는 말이 들리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10시가 가까웠다. 주영은 화면에 띄워놓은 창을 하나씩 끄면서 언제 일어날지 어림하고 있었다. 작업은 몇십 분 전에 이미 마친 뒤였다. 혹시 모를 기회가 있을까 봐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둘은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편집 프로그램을 껐을 때 그녀의 친구가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고 잠시 둘만 남게 되었다. 다른 테이블은 거의 비어있었고 음악은 느린 곡조의 재즈가 흘렀다. 그녀는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운명이, 혹은 카페 직원이라도 대신 열정적인 중재자 역할을 해주길 바랐고, 동시에 자신에게 지독한 경멸을 느꼈다. 친구가 돌아와 다시 앉았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심각해 보였고, 결국 친구가 먼저 가야 할 것 같다면서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나는 조금 더 있다 갈게”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탕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가 열고 나간 문이 닫히기까지 순간이 한없이 길었다. 부엌에서 나는 집기가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전부 멈췄다. 심장 박동 소리가 마치 임박해온 순간을 알리는 것처럼 거세게 울렸다.
“음,” 하고 그녀는 주영을 향해 눈을 치뜨며 미소를 지었다. 난처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자신감에 찬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책을 안 가져와서요. 혹시 하나만 빌려주실래요?”
주영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죠?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저번에 만났을 때 읽고 있는 걸 봤거든요. 표지가 재미있어 보여서 저도 샀어요.”
책을 받아든 그녀는 표지를 매만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 새 책이네. 고마워요…. 잘 읽고 드릴게요.”
직원이 다가와 영업 종료를 알리기 전까지 둘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에너지란 본래 정성적이다.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도 어떤 말 한마디, 혹은 사소한 육체의 교감으로도 원기왕성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고 그들은 한배를 타고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