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작한 첫 1-2주 동안은 중간 중간 짬이 나서 틈틈이 쉬기도 하고, 개인적인 일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개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도 이왕 오셨으니 대신해드리기도 하고, 속상한 일을 쏟아놓으면 들어드리기도 했다. 방문하는 분들이 아빠 엄마 또래이신데, 부모님한테는 속시원히 효도 못하지만 이 분들에게라도 친절히 하고 싶었다.
3주 차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략적으로 봐도 한 시간에 15명 이상은 센터를 방문한다. 한 명이 방문하면 보통은 15분 정도 업무를 보는데, 서류가 특별히 많이 필요한 분은 시간이 30분 혹은 그 이상 소요되기도 한다. 한 사람에게 너무 오래 붙어있으면 뒷 사람이 많이 기다리게 되고, 쉴 시간 없이 뒷사람을 봐주느라 화장실 한 번 가기도 힘들다. 이제 친절하게 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처리해드리는 게 우선순위가 되었다. 마음 급한 분들은 상담도중 쓱 끼어드는 일도 다반사다. 무엇보다 불안과 분노가 가득한 채 센터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운에 숨이 콱 조여서 민원인을 앞에 두고 중간에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만 남기고 복도로 나가서 숨을 고르고 다시 들어온 적도 있다.
얼마 전에는 내가 말실수를 하게 되었다. 한 중년 여성분이 20분 정도 짜증을 내셨다.
‘왜 지난 번에 신청한 것은 아직 안 나오고 늦게 신청한 것만 나옵니까? 이유를 말해보세요.’
‘우리는 접수만 도와드릴 뿐, 승인은 본사에서 하는 일이라,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어요. 조금 기다려보셔야 할 것 같아요.’
‘사무적인 답변만 하지 말고 제대로 된 말을 하세요. 지금 힘들어 죽을 거 같은데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안 나와야 할 게 나오고 나올 건 안 나옵니까?’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말을 듣는 나에겐 나를 힘들게 하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그러면 이번에 나온 것은 받기 싫으세요?’
아차. 속엣말이 튀어나왔다. 민원인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폭발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다. 평소에는 그런 말을 할 일이 없는데 왜 그 말이 툭 튀어나와버렸는지. 곧바로 사과를 드리고, 다른 직원분이 오셔서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너무 미워서 거짓말 같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를 보면서, 직장을 다닐 때 공공사업을 하면서 관료적인 행정의 문제점을 느끼고 분노했었는데, 그 문제가 내 것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일로 윗사람에게 지적을 들으면 기분이 너무 나쁠 것 같은데..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의기소침해 졌다. 며칠 동안 아주머니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고,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아팠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는 저녁식사 시간에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양한 사정이 있어서, 규칙이나 법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했다.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인데 너무 박하게 대하지 말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보라고 했다. 그날을 돌이켜보니 내가 기관의 권위를 업고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나도 그냥 월급 받는 일개미일 뿐, 기관에서 하는 결정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민원인은 나를 통해서 기관에 대해 불만을 말한 것이고, 그 분과 개인 대 개인으로 존중하는 대화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책임이 아닌 일로 나쁜 소리를 들어서 방어적인 태도가 나왔던 것 같다.
지난주에는 마음을 다잡고, 유튜브로 민원인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찾아보고, 어떤 태도를 가질지 연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팁 두 가지가 있었다
1. 고객이 얼마나 많이 화를 내고 있는지 스스로 알게 하기
본인이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상담사의 목소리와 비교하여 알 수 있게,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말하기
다른 사람에게 맡기거나, 다른 자리로 이동하시도록 해 분위기 변화시키기
2. 상대방의 말의 흐름을 따라가며, 원하는 것을 해주기
‘진정하세요’, ‘안 됩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는 모습 보이기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나올 때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면 더 큰 불이 붙는다. 그리고 이 곳에서 상대는 고객이고 나는 직원이니,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더라도 고객보다는 나에게 더 불리하다. 고객은 화내고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 일로 인해 일터가 불편해지고, 심하면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센터에서 롤 모델로 삼고 싶은 과장님이 있어, 그 분이 하는 말을 메모장에 받아썼다가 민원인들에게 똑같이 말하고 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분은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으로 표현을 하신다. 나와 같은 내용의 불만을 말하는 민원인과 상담하는 것을 잠깐 들었는데 ‘뒤에 신청하신 게 먼저 나오셨다니, 정말 운이 좋으세요. 둘 다 안 나와서 속상해하시는 분도 많으시던데. 이거 다른 분들 모르게 조용히 들어가셔요.’이렇게 말하시는 것이다.
유튜브 선생님과 과장님에게서 배운 핵심은, <상대방의 상태를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말고 스스로 느끼게 하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기> 로 정리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2개월 간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작은 사고로 넘어가게 된 것을 다행인 것 같다. 평소에도 위계적인 상황을 못 견디고, 상대가 화내면 똑같이 화로 맞받아치는 것을 콤플렉스로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사회생활 스킬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최근에 읽은 ‘운명의 알고리즘’에서 ‘만만하게 봐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나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 없듯이, 내가 함부로 해도 될 사람은 없다. 그 말을 명심하고 복을 쌓는 시간으로 바꿔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