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머나먼 섬 6 / 당신의 먼 섬 7

by 시인 화가 김낙필



그대의 머나먼 섬 6



머리맡으로 드는 햇살이 따스했다
지끈지끈한 머리통 관자놀이를 누르며 나는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창가 옆 벽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 오른쪽 그녀는 온몸에 시트를 둘둘 말아 덮고 헝클어진 머리채에 가려 얼굴이 절반은 안보였다
잠결에 답답했었는지 슈트니 스커트를 어디로 다 벗어던졌는지 자유분방하게 반라 차림으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반라 차림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내 온도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서 잠결에 자기 방으로 착각하고 벗어 버린 듯 싶었다
이리저리 살펴본 바로 간밤에 서로 다른 불상사는 없이 잘 넘긴 듯 싶었다
갑자기 그녀의 맨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장난스레 흩어져 내려온 머리카락을 살며시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낯선 손길에 움찔하며 그녀의 미간이 순간 찡그려졌다
얼굴 화장이 다 지워진 콧대와 눈가에 주근깨가 자글자글 하다
그 모습이 왠지 소설 속 빨간 머리 앤처럼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다
갑자기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차분하게 눌러 참았다
결국 내 엉뚱한 행동 때문인지 그녀도 기지개를 켜며 낯선 늦잠에서 깨어났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시트를 머리까지 잽싸게 뒤집어썼다
"쌤! 생 얼굴에 머리까지 산발했는데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발 다른 쪽을 좀 봐주세요"
"어쩜~이런 옷도 다 벗겨졌네요"
"네? 벗겨지다니요 저는 손하나 까딱 안 했어요

분명 자발적인 탈의입니다"
잠시 시트 속에서 뭔가를 살피는 듯하더니
"아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ㅎㅎᆢ"
미쳐 덮이지 않아 시트 밖으로 나온 발, 발가락 매니큐어 색깔이 고혹적인 짙은 '바이올렛 핑크'였다
순간 색깔이 이 여자처럼 매혹적인 색감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내외하듯 조심스레 차례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챙겨 입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어젯밤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그녀 모르게 구입한 편강을 커피포트에

듬뿍 넣고 전원을 두세 번 켜고 연거푸 끓여 깊게 우려냈다
그녀의 감기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따듯한 생강차를 마시게 하고 싶은 심정에서 였다
화장을 끝낸 그녀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본다
좀 전에 본 생얼굴과 전혀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다
화려하고 활기찬 변신이 정말 놀라웠다
"어디서 생강 향이 나는 것 같아요, 뭐예요 샘ᆢ?"
진하게 우려진 생강차를 머그컵에 한가득 부어 조심스레 건네며 말했다
"콧물감기 더 심해지지 말라고 제가 끓여 봤네요"
"편강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어요?"
"어제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담배 사며 있길래 같이 샀어요"
그녀는 잔을 받아 들고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가득하게 차오르는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내 성화에 못 이겨 그녀는 생강차 두 잔을 연거푸 마셨고 나머지는
대충 식혀서 5리터짜리 물병을 비워 고스란히 담았다
모텔을 나와 큰길에서 양양 쪽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바다 쪽으로 날씨가 찌뿌듯하고 을씨년스럽다
모텔주인 얘기로는 '물치항'이 그리 멀지 않다고 했으니 간격이 뜸한 시내버스를 한참 기다리느니

택시로 가는 게 훨씬 편할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차는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도로를 따라 50여분을 달렸다
그러나 원하는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미터계의 요금이 6 만원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물었다
"기사님 목적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한참 남았는데요 왜요?ᆢ"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저 기사님 모텔 주인장께서 물치항이 멀지 않다고 해서 택시를 탔는데 말과 현실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네요"
"목적지까지 가려면 요금이 얼마나 더 나올까요"
"글쎄ᆢ12만 원 정도 나오겠네요"
"넹? 기사님 죄송한데요 목적지까지 그렇게 먼 줄은 잘 몰랐네요
"저기 정류장에서 그냥 내려주세요 버스 타고 가야겠어요"
"물치항이 가깝다고 알려주신 그분을 믿은 우리가 잘못였네요"
아저씨가 황당한 듯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보더니 대답이 없다
나는 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려주세요 아저씨ᆢ"
아저씨가 말했다
"내참ᆢ가다가 내리면 서로 뭐가 좋겠어요 초행이시라니 제가 손해보지요"

"10 만원만 주세요"

"기사님 8 만원만 받으세요, 아니면 내려 주시던지요"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렇게 택시비까지 깎고 물치항 포구 횟집에 다다른 우린 조금은 좀 전의 상황에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목적지까지 미터기 요금은 12만 원이 조금 덜 나왔으나 예상보다 훨씬 더

먼 거리였다
"어떻게 택시비를 깎아요ᆢ?"
"쌤ᆢ아주머니 때문에 버스로 올걸 택시로 오는 바람에 거금 날린 셈이 잖아요"
"대충 알려준 모텔 아주머니 아주 못 됐어요"
"그 기사님과 아주머니랑 혹시 부부 아니 신가 모르겠네요?"
"어쩐지 그분들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드네요

왠지 그 사람들 각본에 속은 기분이네요 ㅎㅎᆢ"
"캐리어가 두 갠데 버스 계단 오르내리기도 귀찮고 해서 가깝다니까 편한 택시를 이용하려고 했던 건데ᆢㅎㅎ"
거기에다 내 신용카드 결제를 굳이 마다하고 그녀가 현금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해주는 바람에 내가 더 많이 무안하고 미안스러웠다
그녀는 야무지게 말했다
"제가 회 한 접시 값은 벌었거든요 샘.."

# 편강 : 생강을 얇게 저며서 설탕을 넣고 졸여서 말린 것







당신의 먼 섬 7



우리는 광어와 우럭, 삼식이을 골라서 메인 횟감으로 잡고

산 오징어와 멍게는 인심 좋은 주인장께서 덤으로 주시기로 했다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활어의 살을 발라 회를 치고

뼈와 내장 부속물들은 매운탕을 끓여 곧바로 한 상차림이 올라왔다

둘이 먹기에는 좀 양이 많은 듯했지만 오히려 푸짐한 게 좋았다

어제 먹은 술이 채 깨기도 전에 우린 다시

소주잔을 부딪히며 늦은 낮 해장술을 시작했다

하룻밤을 동숙했는데도 밤과 낮이 바뀌자 아직은 왠지 서로에게 어색하고 어눌하고 조심스러웠다

속이 후련해지는 얼큰한 매운탕에 반공기씩 나눠 밥을 말았다

회가 많이 남았지만 배가 차서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라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물치항만의 후한 인심을 듬뿍 받을 수가 있는 푸짐한 식탁이었다

다음 일정은 서로 정한 바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일 뿐 서로 말이 없어졌다

아츠코가 어제 밤차 안에서 동해시에 사는 친한 언니 집을 방문한다고 했으니

강릉 여객터미널로 되돌아 가야 했다

가기 전에 소화도 시킬 겸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나눠 끌고

해변 뚝길을 따라 해풍을 맞으며 해안가 도로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보다 차가웠다
먼 수평선으로 성난 검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면서 금새 한바탕 무언가를 퍼부을 채비를 하고 있는 듯한 날씨였다
여차하면 순식간에 폭풍이 몰려와 거친 비바람을 쏟아낼 기세다
그녀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밭은기침을 했다
잠깐 도로변 안전 돌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횟집에서 사장님께 부탁해서 덥혀온 생강차를 꺼내 한모금 마시게 했다
또 멀뚱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또 눈시울을 붉히는 듯했다

생강차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또 다른 어떤 효력이 있나 보다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포구 주변 길가에 공중 화장실이 변변 할리가 없으니 행여 불편하면 어쪌까

하는 괜한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급한 모양이니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볼일 보러 간 잠깐 사이

나는 그녀의 짐을 살피면서 먼바다를 바라봤다

우리가 지금 왜 이곳에 함께 있을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가

마치 꿈을 꾸는 듯도 싶었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그녀의 표정부터 나는 조심스레 살폈다

"어때요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았어요?"

"아뇨 그런대로 참을만하던데요ᆢ"

"옛날 시골집에서 재래식 뒷간을 썼던 기억이 나서 그런대로 참을만했어요

ᆢ급한 불은 껐네요"

"다행이네요 불편할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애들도 아닌데 괜한 걱정을 다 하시네요"

우리는 다시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말없이 걷고 또 걸어갔다

침묵 끝에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어왔다

"샘ᆢ 혹시 저에게 4박 6일쯤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은 제가 샘 허락도 없이 다음 주 목요일 오후 출발하는 말레시아행 항공권 2매를 예약해 뒀어요"

"샘이 함께 가 주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지만 행여 같이 가주신다면

제겐 커다란 행운이고 기쁨이겠지만 안되시면 저 혼자라도 갈 생각이었어요"

"무례하게 의사도 묻지 않고 행동해서 기분 나쁘시면 제가 사죄드릴게요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시고요"

저는 단순하게 같이 여행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고요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백할게 하나 있어요"

"샘 여권 사본은 제 친구가 서울 소재 유명 여행사 동남아 지역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전산 조회를 부탁했어요"

"다행히 얼마 전 일본 다녀오신 샘의 여권 카피가 남아있어서 그 자료로 친구가 대신 항공권 예약을 해줬어요"

"물론 불법이라 발각되면 직장에서 잘린다는 걸 제가 손발이 닳도록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거든요"

"나중에라도 발각되어 잘리면 나고야에 여행사 관련 회사에 책임지고 자리 마련해주는 조건으로 이 일을 무모하게 공모했거든요"

"샘 놀라시겠지만 저를 범법자로 만드시던지 동행을 허락해 주시던지 샘께서 결정해 주셔야겠어요"

......

이런 황당한 일을 꾸미는 그녀의 저의가 무엇인지

너무 돌발적인 제안이라 나는 잠시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아츠코ᆢ 이건 너무 일방적이고 무례한 처사가 아닌가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런 무모한 일을 혼자 강행하셨는지요"

"저를 잘 아세요?ᆢ이제 두 번째 보게 된 사이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도 없이 무모하게 벌일 수가 있나요

전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

"샘ᆢ저는 선생님을 잘 알아요

콘테츠에 나와있는 샘의 삶에 대한 궤적, 작가 경력, 활동사항, 작품, 나이, 출신학교, 거주지,

전화번호까지 DAUM에 다 밝혀져 있더라고요"

"또 샘의 카톡, 카스, 카뮤, 블로그, 브런치, 페북에 올려진 글, 그림, 문학예술 전반에 관한 모든 활동사항이 오픈되어 알려져 있고요"

"관심만 가지면 나날이 어떤 생활을 하시고 계시는지 매일 업데이트하는 카스나 블로그 보면 훤히 다 알 수 있는걸요"

"제 말이 틀렸나요?"

......

다 맞는 말이다 구구절절ᆢ

나를 알고자 하면 작품집이나 다음, 네이버에 모든 동정이 다 올려져 내 손으로 직접 매일매일 업그레이드되고 있지 않는가...

......

"몇 해 전부터 쭈욱 샘의 모든 작품을 보고 있고요 업그레이드되는 글, 활동사항을 주의 깊게 봐 왔어요"

"샘의 시집은 늘 머리맡에 두고 애지중지 애독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전 전부터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존경하고 좋아해 왔으니까요"

......

왠지 그녀 행보 앞에서 발가 벗겨진 기분이랄까 순간 소름이 온몸에 돋았다

내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쯤으로 생각하기엔 좀 심하다고 나름 판단하고 조심해야겠다고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다


"동해 언니네 들렀다가 말레시아 출발 전 전일 화요일쯤 서울로 올라갈 거예요"

"제 서울 호텔 숙소는 동대문 소재 <Toyoko inn seoul> 예요"

"샘ᆢ제 명함 드릴 테니 동행 여부 결정하셔서 연락 주시던지 당일 오후 5시에 인천공항 È 카운터 앞에서 만나는 걸로 잠정 약속합니다"

"샘ᆢ 저는 함께해 주시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저는 그럼 여기서 작별하기로 할게요"

"상경하시는 길 편히 조심해 올라가세요"

"같이 동행해준 이틀 동안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동해시로 가기 위해 강릉 시외버스 터미널로 택시에 몸을 싣고 서둘러 떠나가 버렸다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다고 해도

굳이 이 자리에서 헤어지자고 그녀는 고집을 피웠다

이 상황을 만든 지금 자신이 내게 미안하고 불편해서 자리를 애써 빨리 피하기 위한 행동 같아 보였다

그녀를 그렇게 동해로 떠나보내고 나서 나는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강릉 터미널로 향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울산 바위 쪽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중대한 숙제 하나를 풀어야 하는 갈등과 번민이 나를 서서히 옥죄어 오는 듯했다

그 순간 과음으로 인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고

서울로 오는 동안 버스 안에서 나는 죽음 같은 깊은 잠은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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