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코와 헤어져 돌아온 다음날 오후 도서관 열람실 800번 코너를 다시 찾아갔다
이틀 사이 <당신의 아주 먼 섬>의 173쪽이 자못 궁금했다
새로운 쪽지가 또 들어 있을까ᆢ
다행히 책은 대출되지 않은 채 서고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책을 꺼내어 떨리는 손으로 173쪽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노란 메모지가 순간 눈에 들어왔다
만년필로 곱게 내려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샘ᆢ 역시 인천 공항에서도 뵙질 못했습니다"
"귀국 전 18일 오전 11시에 공항 출국장 G카운터 앞에서 뵙길 소망합니다"
아~ 그날 그들이 조우하는 장면을 나도 보지 못했듯 결국 이들은 그날도 만나지 못했구나ᆢ
......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작정한 일은 아니지만 그냥 간단한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속옷 정도 짐가방에 넣고 보니 가방 절반이 비었다
여권을 챙기고 여행 경비는 공항 환전소에서 환전하기로 한다
오후 다섯 시까지 "E"카운터로 가려면 세시 정도에는 공항 리무진을 타야 한다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았지만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만 몰려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가타부타 가부조차 주지 못하고 여직 망설이고 있는 황당한 꼬락서니 다
공항 1 터미널에 리무진이 도착한 시간은 약속시간 30분 전이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 E 카운터까지 천천히 걸었다
È 카운터 티겟 자동 발권대 앞 의자에 앉아서 출입구 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날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서 왼쪽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인디언 블루 빛깔의 원피스와 채양이 큰 하얀 여름 모자를 쓴 그녀는 한껏 생동감 있어 화려해 보였다
더운 나라로의 여행이다 보니
시원스러운 여름 복장으로 한껏 치장했을 터이다
이렇게 또 다른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인가ᆢ
23열 A, B 좌석 통로 쪽에 내가 앉고 그녀가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내겐 통로 쪽을 굳이 고집하는 사정이 있다
가운데 좌석에 앉으면 답답해져서 식은땀이 흐르고 고통이 따른다
폐소 공포증 비슷한 증세인데 의사는 경미한 공황장애의 일종이라고 진단했다
아일 시트에 앉아 다리 한쪽을 통로 쪽으로 놔야 몸이 그나마 폐쇄로부터 안심을 한다
그녀가 말하기를 쿠알라룸푸르에서 1,2박 하고 버스로 싱가포르 국경을 넘어가는 일정이라고 했다
여행에 들뜬 그녀가 일정을 상세히 설명하느라 가는 동안 분주했다
숙소며 교통편이며 관광할 곳을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했다는 것을 그녀가 건네준 일정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 여행을 철저히 준비해온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ᆢ
나는 이대로 대책 없이 함께하는 이 여정을 무방비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ᆢ
여행 중에 제법 친해지면서
그녀가 조금씩 조심스럽게 알려준 그녀의 인생 이력은 이러했다
《아츠꼬는 마산 출생이라고 했다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호텔 관광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H여행사에 근무했으며 경복궁 역사 해설사로 일하다가 관광 온 이태리 남자를 만나서
열애 끝에 결혼했다
이탈리아 해양도시 '아몬데로소'에서 1년쯤 살았을 때 남편이 스킨스쿠버 강사일을 하다
갑자스런 수중사고로 사망했다
귀국 후 마산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누구의 아이인지 묻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딸아이 하나를 낳았다
미혼모를 보는듯한 동네 사람들의 불편한 눈총을 피해 도쿄에 사는 이모집으로 거처를 이전했다
(아츠코의 엄마는 어려서 그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재가했다
재가한 가정에서 2남 1녀를 낳아 기르면서 친모는 두고 온 딸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참으로 지독하고 매몰찬 모정이었다)
그 후 직장 때문에 나고야로 딸과 함께 이주했다
나고야 관광청에 근무하며 딸은 16세가 되던 해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보냈다》
아츠코의 여행 일정표는 4박 6일이 아니고 8박 9일로 짜여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자 살짝 웃으며 짓궂게 변명 같은 핑계를 댔다
"샘과 중간에 사이가 안 좋아지면 일찍 돌아 갈거고요
더 좋아지면 일정대로 밀어붙이려고요"
난감한 내 표정을 보더니 몸을 가만히 내 어깨 쪽으로 살짝 기대어 온다
오늘도 그 라벤더향이 나에게 바람처럼 스쳐갔다
'일찍 가려면 싸워야 하겠구나' 쓴웃음으로 내심 생각했다
그녀가 내민 여행 일정표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세밀했다
오랫동안 계획하고 작업했던 흔적이 느껴졌다
사랑,
그것은 지상의 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나며
전혀 다른 향기를 흩뿌리는
하늘의 꽃이다
사랑,
그것은 허상이며 허무이며
꿈처럼 달게 찾아왔다가
가을 낙엽처럼 쓸쓸하게
퇴장하는 무명 배우의
독백 같은 것이다
사랑,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영원하지도 않은
한 시절 놀이 같은 것이다
지나고 나면
씁쓸한 씀바귀나물 같은
씀 씀 한 맛으로 남는 추억의
일기장 같은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