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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Jan 18. 2022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주인공으로

정세랑 <피프티 피플> 서평

그리고 사람들


  기가 막힌다.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드는 구성이었다. 과연 50명의 주인공으로 한권의 소설을 만들 수 있을까. <아리랑>이나 <해리포터> 정도 되는 연작이 아니고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정세랑은 멋진 이야기꾼이다. <보건교사 안은영>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한나절에 술술 읽었다.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을 이렇게 재미있게 이어 나가는 작가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찌된 일인지 학창 시절 좋아했던 만화들이 떠올랐다. <허니와클로버>나 <블리치>, <강철의 연금술사>. 그중에서도 조연이었던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등장인물 모두를 주인공만큼 생생한 서사를 가질 수 있는 이야기에 오래 마음을 사로잡힌다. 조연이 주연보다 빛을 내지 않더라도 좋다. 그래도 충분히 멋지고 예쁘고, 매력 있게 묘사하는 재주가 작품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처음에는 모든 인물의 이름을 외우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의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데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아도 행복한 인생이 궁극적인 목표다. 누군가 책의 중간 페이지 어딘가에서 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10분 남짓한 시간동안 호기심이나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하다. 한 분야의 최고나 1인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가지고 있지만, 보통의 사람으로 인생을 만끽하는 캐릭터가 되는 쪽도 재밌을 것 같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나니 <피프티 피플>의 만듦새에 다시금 놀라게 됐다. 우주에 대한 상상보다도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정도로 구체적인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려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또래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설가는 도대체 어떤 이들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를 보낼까 궁금해졌다.      


 이 책에는 병원을 오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간호사도 있고, 환자도 있고, 의사도 있고, 시신을 옮기는 관리인도 있다. 몇몇은 친구나 가족의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50명분의 인생을 모두 직간접 체험해 이렇게 그럴듯한 인물로 그려내려면 도대체 몇 명분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봤을까.      


 나도 탁월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내가 몸을 기울여 관심을 가질 만한 인생을 살거나, 그만한 에피소드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기자라는 직업에 만족도가 높은 이유이다. 하지만 점점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계절 마음을 끄는 화제가 있으면, 금방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이전에 느꼈던 진한 감동의 파장은 글이나 영상으로 저장해 두지 않으면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다.      


 일단, 그냥 적어보자. 가능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붙잡아두자. 그러면 언젠가는 이 소설과 같은 대서사시를 엮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신기한 이야기를 잔뜩 알고 있는 할머니로 익어가면서, 여행사 가이드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나의 꿈이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처럼 온갖 환영을 다 받고 사는 게 내 남은 인생의 비전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주인공을 만들 줄 아는 이야기꾼이 되어 보겠다.   


#정세랑 #피프티피플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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