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신을 믿는 것은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고 한다. 전자는 동의할 수 없지만, 후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강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한계를 마주하기 전에는 결코 신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의 지식으로 존재를 논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복음(신을 인정하고 믿는 일) 또한 인간의 이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영과 육, 혼을 쪼개고 들어와 꽂히는 강렬하고 신비한 체험이다. 이해가 아닌 무조건 믿어지는 영적터치에 의한 택함이며 받아들임이다.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면 인간의 모든 궁금증이 풀린다. 알곡과 가리지가 왜 세상에 섞여 사는지, 선과 악이 왜 공존하는지, 힘들어도 왜 죽지 말고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부와 명예와 권력이 왜 축복이 아닐 수도 있으며 가난과 고난이 왜 유익일 수도 있는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의문이 한순간에 풀린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신자였다. 불교를 믿을 때에는 무엇이든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삶이 버거웠다. 고난이 극에 달할 때에는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불교는 적선을 해서 그만큼의 덕으로 윤회를 하거나, 지은 업보에 따라 윤회를 한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고해의 바다인 세상에서 108개의 번뇌를 수행으로 깨달아 초월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더 나아가 생로병사를 완전히 벗어나면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인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인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수행과 깨달음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
불교의 그런 가르침은 평소에는 통한다. 어느 정도의 고난 앞에서도 통한다. 이 또한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난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런 가르침이 통하지 않는다.
한계 앞에서 인간은 적선도, 윤회도, 해탈도, 열반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무소유니, 자비니,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도 무용지물이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런 것들은 피부에 닿지 않는다.
극락도 지옥도 연옥도 인간의 힘으로 범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으로 그곳에 이르거나 피하라고 한다. 수행도 할 수 없는 지경의 인간은 살수록 업보만 늘리는 꼴이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한계를 경험하면 불교를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람답게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아무리 선하게 살고자 해도 넘어져 울 때가 더 많았다. 거기에 운명이나 숙명, 업이나 팔자라는 말이 붙으면 꼼짝없이 갇혀 체념하거나 좌절했다.
석가모니부처는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니 수행하고 깨달아 나처럼 부처가 돼라’고 했다.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한테 자꾸만 해탈해서 부처가 되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책하며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반면 하느님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세상이 악하고 삶이 힘든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당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믿고 따르면 마음속 소원까지도 이루어준다’고 했다. ‘무거운 짐은 모두 당신께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청하는 기도는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게 하지 않고 모두 들어준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셨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시기의 빠르고 느림이 있을 뿐, 그분이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 ‘당신이 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확신을 주며 나타난다. 하느님은 ‘신과 사람의 차이, 사람의 한계와 신의 무한대’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주셨다.
그분은 단호하지만 인자하고, 예리하지만 따뜻하다. 고난 앞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들었던 나처럼 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그런 신을 믿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알려주는 것을 따라 해 보기를 바란다. 속는 셈 치고 일단 해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돈 한 푼 안 들어가는 이 쉬운 것도 해보지 않고 신에 대한 왈가왈부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먼저 이렇게 물어보라.
“하느님, 누가 자꾸 하느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믿기지가 않아요. 만약 있다면 저도 좀 만나주세요.”
그런 후, 아래 올려주는 기도문을 따라 해 보기를 바란다.
아래 올리는 기도문에는 신이 원하는 것과 인간이 원하는 것이 모두 담겨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신께 청할 수 있는 최상의 기도인 것이다. ‘도와주세요, 잘못했어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하며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이 기도문 하나면 충분하다.
이 기도문은 예수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주님의 기도’로, 개신교에서는 ‘주기도문’이라고 부른다.
나는 불교에서 개신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간 사람이라 지금은 ‘주님의 기도’라고 칭한다. 하나님도 지금은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호칭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믿는 신은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의 하느님이신 창조주를 뜻하기 때문이다.
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이 다른 것은 번역의 차이다. 가톨릭은 라틴어 번역을 따르는데 라틴어의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다.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미사 전례 시 주님의 기도에서 드린다. 그때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고 기도한다.
평상시 기도에서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대신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하는 영광송을 주님의 기도와 함께 바친다. 그러니 그러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두 기도문 중 어떤 기도문을 따라 해도 괜찮다.
앞서 말한 대로 먼저 이렇게 말해보라.
“하느님, 누가 자꾸 하느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믿기지가 않거든요. 만약 있다면 저도 좀 만나주세요.”
다음에는 아래의 기도문을 따라 해 보라.
가톨릭의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개신교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한 번만 하고도 신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여러 번 기도해도 못 만나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것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신을 못 만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 반드시 존재를 나타내신다.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며 지금도 기다리신다. 하느님을 먼저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눈이 있어도 눈먼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귀먹은 이자들을 나오게 하여라.
- 구약성경 이사야서 43장 7절, 8절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면서,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슬처럼 사라지기를 바라는가? 그러한 것들을 알고자 하지도 않으면서 삶과 죽음, 사람과 세상을 논하며 신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떠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부와 명예와 권력은 클수록 행복하다고 부러워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모두 취해서 누리고 살다가, 죽은 후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서도 ‘없는 줄 알았다. 정말 몰랐다’고 하는 것이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말 그대로 그냥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알고자 해도 알 수 없어서 못 믿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것이 신을 만나는 사람과 못 만나는 사람의 차이다.
과학도 사람과 세상, 신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이지 과학으로 증명하는 어느 하나도 처음인 것, 즉 창조된 것은 없다. 그렇다면 과학에서 사용하는 이미 존재하는 그것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에서 진화를 거론할 필요는 없다. 과학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증명이라도 하지만, 진화는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몇 줄로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차제에 다시 거론할 생각이다.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만 신을 믿는다는 생각이 이제는 조금 유연해졌기를 바란다. 강하고 풍족하고 똑똑한 사람 중에도 신을 믿는 사람은 많다. 유명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도 창조주를 믿는 가톨릭신자다. 그녀는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기도한다.
아이스링크에서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서 가슴까지, 왼편 어깨부터 오른편 어깨까지 십자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며 손을 모은다. 김연아 선수가 아이스링크에서 하는 기도를 ‘성호경’이라고 한다.
성호경 기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느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성자 예수님, 마지막 날까지 악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오신 성령님께 십자가를 그리며 드리는 기도다. 그 짧은 기도에 내포된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축구계의 이영표 선수 역시 개신교신자로 창조주를 믿는 사람이다. 그 외에도 유명인 중에는 신을 믿는 사람이 많다.
한국문학계의 거장 윤동주 시인 역시 창조주를 믿는 사람이다.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자화상 등이 모두 그러하다. 여기에 시인의 시 한 편을 공유한다.
십자가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년 作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신을 믿는다는 생각은 이제 오해이기를 바란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다.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신을 믿어서 강하고 지혜로워졌다고 하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신을 알고자 하지도 않으니 제대로 알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로 인해 신마저 모욕을 당하는 세상이다. 일반적인 상식이나 양심에도 못 미치는 다수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모든 기독교인이 뭉뚱그려 조롱을 당하고 신마저 핍박을 받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건물로 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설령 기독교인 모두 모범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신의 존재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신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사람이나 건물을 보고 단정하지 말고, 신을 찾아 간절히 알기를 청하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에게 신은 반드시 존재를 나타내며,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 구약성경 이사야서 43장 2절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 구약성경 시편 37편 4절-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