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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파엘라 Oct 22. 2024

정치인이 될 뻔 했어

돈키호테엄마의 무모한 도전기

  이 글은 지방선거 출마와 여의도의 한 선거캠프에서 겪었던 정치에 관한 이야기다.


  박사과정 논문학기에 전략공천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졸업 후의 진로가 정해진 상태에서 낙선이 훤한 무연고 지역으로의 출마를 아는 이들은 반대했다. 특히 아들의 반대는 심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해? 거기는 지역유지라도 그 옷 입고 가면 떨어진다는데 엄마가 돈키호테야? 그렇지 우리 엄마 돈키호테 맞지.”

  

  아들의 말이 옳았다. 상대후보는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하고 4선에 도전하는 현직의원이었다. 그러나 출마를 만류했던 아들은, 후보등록 후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곁을 지켰다.      


  지인들에게조차 알릴 겨를도 없이 불시에 출마한 선거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유권자들을 만나며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  

  유권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당을 잘못 선택했네!’였다. 다음으로 많이들은 말은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였다. 배우자가 없다는 것을 안 후에는 ‘남편 없는 여자가 어떻게 정치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살면서 남편의 부재를 숨겨왔다. 호구조사를 하듯 배우자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주말부부 또는 해외출장 중이라고 둘러댔다. 지금도 출마사실을 아는 사람들 외에는 나에게 배우자가 없다는 것을 아는 주변인은 많지 않다.

  사업을 하면서 그것을 공개하는 것은 불편을 야기했다. 하지만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는 모든 신상이 공개되었다. 유권자들은 공약보다 소문과 네거티브에 반응했다.


  후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질문이나 반복적인 허위사실 유포는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나의 그런 고충을 지켜보던 아들이 작심한 듯 SNS에 글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00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000후보의 아들, 000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책임감이 강하고 따뜻한 분입니다. 어머니는 일과 학문, 남을 돕는 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입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따뜻한 분이며 청렴하고 깨끗한 분입니다.


  어머니는 단순히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을 너머 도덕적으로도 흠결을 찾기 힘든 분입니다. 사회적 타협이나 유혹에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답답할 만큼 정도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도의원은 도민을 대변하고 도민의 권리를 합리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책임 있는 자리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공직자로서 임무를 수행함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또한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한 분입니다. 후보의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검증은 이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 중 대부분은 공사구분 없는 행정인데, 그 원인은 특히 정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공적인 업무수행과 사적 인간관계 사이의 균형을 갖추신 분입니다. 어머니가 가진 도덕적, 정무적 균형감각은 출마지역과 관련지역 간 균형발전과 조화를 이루는데 유용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신 분입니다.


  성장기에 어머니는 저에게 세계를 바라보고 인류를 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문대나 부와 권력을 탐하지 말고 사람다운 사람, 지켜야 할 세상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한때는 그런 말씀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일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이웃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사람이 희망이라며 배신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람을 멀리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분이 제 어머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자랑입니다.

  제가 느끼는 이 기쁨을 많은 분이 함께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를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힘내세요! 어머니는 이미 최고십니다. 파이팅!”   

  

  아들의 편지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눈 녹듯이 풀렸다. 돌이켜보면 좋은 분들을 훨씬 많이 만났다. 손을 잡아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장하다고 안아주시던 분들, 지역의 고충을 토로하며 해결해 달라던 간절한 눈빛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소수의 악의적 언행이 두드러져 좋은 분들의 인정을 희석시켰다.


  사실 당선을 목표로 출마한 것도 아니었다. 당선이 목표였다면 당선 가능한 연고지에 출마했거나 어느 정도 준비는 했을 것이다. 그것을 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내 목표는 학위를 취득하고 전공을 살려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출마는 그것을 위한 현장경험 정도로 생각했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작정을 이미 다.

    

  나는 학업을 재개하면서 크고 작은 기관의 책임자로 있는 선‧후배나 동기들, 그리고 지인들이 정치권에 휘둘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어느 한쪽에 줄을 댔다가 그들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는 도미노현상도 보았고, 살면 같이 사는 파죽지세도 보았다. 양쪽 모두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무엇을 하든 정치권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혹여 당선이 되더라도 재선삼선은 생각조차 하지 말고 소신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던 내가 별것도 아닌 말에 휘둘리고 있었다.  

   

  아들의 글을 읽은 후, 불편했던 말들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악의적 말을 하는 유권자들이 나쁘게만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유 있는 것이니 존중은 못해도 무심할 수는 있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축제를 하듯 지역을 돌며 몸이 부서져도 좋다는 각오로 뛰었다. 그 험한 길을 함께 달려준 아들이 지금도 대견하고 고맙다.


  선거가 끝난 후에는 그 어떤 미련도 후회도 남아있지 않았다. 알람 없이 잠자리에 들어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수면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평안했다. 지지자들에게 전하는 감사인사를 끝으로 모든 선거일정이 마무리되었다.     


고난의 길 벼랑 끝에 섰을 때

다가와 불쑥 내밀어 주는 손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지키는

이 시대 깨어있는 양심들의 손

비장하고도 절박한 용사들의 손

가난하지만 담대한 동지들의 손

아, 이 얼마나 살맛나는 세상인가!

굶주림에 표호 하는 사자의 이빨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의 소굴에서

배신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건

사람이 희망임을 아는 까닭이다.     

 

  ‘당선보다 더한 넘치는 사랑과 뜨거운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빚진 마음 큰 그릇에 담아 희망으로 일구며 빛으로 승화시키겠습니다. 평화를 수호하고 정의를 지키며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낙선 후, 이런저런 직책을 주었지만 모두 고사했다. 남은 반년은 논문을 마무리하고 전공 관련 일을 할 계획이었다.

  그 무렵 출마했던 정당의 당 대표선거가 있었다. 후보로부터 캠프에 합류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인물이었고,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수락했다. 스스로 늪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여의도의 그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당선도 되기 전에 자리를 탐내며 김칫국을 마시는 사람에게 후보는 이용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캠프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경계해 문전박대하기 일쑤였고,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느냐’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설득해야 할 마당에 오는 사람도 내쫓는 해괴한 사람들이었다.


  지나치다 싶어 언행을 제지하자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처음 캠프에 갔을 때, 후보의 수행원들은 나를 ‘대변인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정치초보였다. 무엇보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후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합류했을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당락과 관계없이 계획한 일을 추진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밟고 뭉개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후보는 캠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부일정에만 전력투구했다. 알면서 넘길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지만 깊은 속내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이들에게 캠프를 맡기고 현장으로만 도는 후보가 답답하고 안쓰러웠다. 선거가 끝난 후, 장문의 편지를 후보에게 전하고 그을 떠났다.

      

  “지지자들을 보면 리더가 보이고, 리더를 보면 지지자를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인들 관리에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쓰시면 좋겠습니다. 의원님이 가는 길에 화근이 될 요소들은 과감히 걷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들에 단호하지 못하면 대로를 걸으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빛을 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발목이 잡혀 걷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충정으로 헤아리시고 뜻 하시는 바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치를 통한 경험은 좋고 나쁨을 떠나 세상과 사람을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낙선을 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때 당선가능지역에 출마해 배지라도 달았다면, 나는 조직에 물들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곳은 소신보다 합심을 따라야 살아남는 곳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조직에서도 어느 정도 요구되는 것이지만, 정치나 종교집단은 어느 정도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 특이한 경험을 정신이 베이도록 하고도, 나를 잃어버리지도 훼손되지도 않은 상태로 보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선거철이면 가끔 합류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제는 요청에 의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 소신과 양심,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 싶은 것을 행하고, 멈춰야 하는 순간에는 즉시 멈춘다. 많은 사람이 칭찬으로 모여들었던 지난날보다, 많은 사람이 줄어든 지금이 나는 훨씬 행복하다.


  이 책 제목을 처음에 ‘돈키호테엄마의 000’이라고 지었을 때 아들은 ‘엄마한테 딱 어울리는 제목'이라며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지금의 제목을 붙여주었다. 아들이 쓴 시와 랩 몇 편도 수록하면 어떠냐고 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지금도 아들은 나를 ‘돈키호테엄마’라고 부른다.


  아래 올리는 글은 오래전 아들과 함께 보았던 뮤지컬 ‘맨 오브라만차’의 대표곡 '이룰 수 없는 꿈'의 가사 일부다.


Es la misión del verdadero caballero. Su deber. No! Su deber no. Su privilegio.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 아니!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노라.

Soñar lo imposible soñar.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Vencer al invicto rival,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Sufrir el dolor insufrible,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Morir por un noble ideal.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Saber enmendar el error,

잘못을 고칠 줄 알며,

Amar con pureza y bondad.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Querer, en un sueño imposible,

불가능한 꿈 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Con fe, una estrella alcanzar.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 뮤지컬 ‘맨 오브라만차’ 대표곡 이룰 수 없는 꿈 中

            

    나에게도 많은 사람이 ‘그건 천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할 때가 많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이용만 당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다.

  '천국은 하늘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또한 알면서 당해주는 것은 이용이 아니라 선택과 도전에 따른 영광의 성처랍니다. 아무렴 돈키호테만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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