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학도가 되었다. 나의 도전이 아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어 사춘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 후 꼬박 10년을 일과 양육, 학업을 병행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길게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하다가 아들이 학업을 마치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이런저런 공부가 더 하고 싶었고, 박사과정까지 갔다. 무엇에 꽂히면 과잉 몰입하는 성격 탓이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면 한동안 탐색기간을 갖는다. 버릴 것과, 끝까지 해야 할 것, 보류해야 할 것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기준은 ‘잘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감’이다. 그것이 파악되면 속전속결이다. 해야 할 일이 결정되면 밤낮없이 몰입한다.
그럴 땐 식사시간과 수면시간도 불규칙하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면서 눈만 뜨면 그 일을 한다. 지나치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않으니 문제 될 일은 없다.
엉덩이가 무거운 것도 수능수험생 저리 가라다. 아들이 수험생일 때 우리는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는 일이 많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엉덩이가 무거운 아들도 나를 보면 혀를 내둘렀다.
“보다 보다 엄마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화장실도 안 가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앉아있을 수 있어?”
“그러게 생각이 안 나네. 잊어버렸나 봐.”
나무를 캐자면 뿌리가 뽑힐 때까지, 우물을 파자면 물이 나올 때까지 판다. 그래서 초기결정이 빠르고, 포기해서 버린 것들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보류되어 중단된 것은 언젠가는 재개한다. 결과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쏟아내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후회나 미련이 없다.
나의 꿈은 군인이었다가, 천체 물리학자였다가, 교사였다가, 작가였다가, 오지탐험가였다가, 대안학교설립자였다가, 영화감독이었다가, 사회사업가로까지 이어졌다. 그 중 가르치는 일과 쓰는 일은 해봤으니 이루어진 셈이다.
오지탐험가와 영화감독은 여전히 관심 안에 있지만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첫 행사를 끝으로 중단된 사회사업은 상황이 주어지면 재개할 생각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회복지와 평생교육을 전공했다.
학부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한국어문화를 복수 전공했다. 문예창작을 공부할 때에는 습작만큼 합평의 기회도 많았다. 그때 학우들과 했던 합평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인들과의 합평은 서로 존중하느라 너그럽기 그지없는데, 학우들의 합평은 화살촉 같아 감사했다. 서툴러도 예리했고, 오독해도 객관적이었다.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교수님의 가르침과 평가는 문학예술을 창작하는데 전반적 시각과 방향을 제지했다.
한국어문화를 복수 전공한 것은 세계의 오지를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당시에는 학부졸업과 한국어교원 2급 자격증만으로도 해외대학에 교수로 갈 기회가 있었다. 그걸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 배운 교수자로서의 한국어와 한국어문화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펼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대학원에 재학 시에는 몇 번의 대학 강의제안을 받았다. 대부분은 거리가 있어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했고,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졸고 딴짓하는 학생들이 섞인 공간에서는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교육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들을 키우면서 가슴 졸이는 학부모들을 수없이 보았기에 교육만큼은 재능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배워서 남 주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죄입니다.”
그 후 몇 년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강의했다. 거듭되는 부탁도 있었지만, 당시 기분이 많이 침체되어 있던 시기라 변화가 절실했다.
학기 초가 되면 학생들과 약속을 했다. 잠을 자도 게임을 해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 시끄럽게만 하지 말라고. 혹시 소리를 낼 일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하고 오라고. 강의평가에는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을 테니 그것만은 지켜달다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특단의 조치로 강제퇴실 시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처음에는 ‘설마’하며 미적대던 학생들이 단호함을 인지하고 자진해서 퇴실했다. 그런 조치가 몇 번 더 있은 후에는 더 이상 퇴실되는 학생이 없었다.
처음에는 ‘재수 없는 교수’라고 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런 학습 분위기를 응원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 멋진 제자들에게 편지를 비롯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동안 침체됐던 마음도 한결 나아졌다.
만학은 나를 한층 성숙시키고 성장시켰다. 그것은 동기부여가 되어준 아들의 덕이 크다. 어떤 이는 남편도 없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며 어떻게 공부까지 했느냐고 물어본다.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대단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내가 얼마나 게으르고 약한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 역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굉장히 많았다. 무언가 선택하고 도전하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것을 다독이고 추스르며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나의 만학 역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 만학의 안내자는 아들이었고, 그 일을 총괄하신 분은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