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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파엘라 Oct 22. 2024

학부모가 되었어

돈키호테엄마의 눈물콧물 교육기

  글은 기독교대안학교와 특목고에서 겪었던 아들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년시절 아들은, 자기가 읽은 책을 남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놀이터에 가면 아들에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아들은 서슴없이 미끄럼틀에 올라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곤충부터 공룡에 이르기까지, 아기돼지 삼 형제부터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물론이고, 했던 이야기를 또 들을 때에도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들은 아들이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는 아들 덕분에 부러운 엄마가 되었다. 아들에게 그림과 악기 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주었지만, 아들은 대중 앞에서 자기를 표현할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책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거실을 서재로 만들었다. 생활비의 상당부분이 책값으로 지출되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넘치면 읽은 책들은 기부를 했는데 그때마다 실랑이를 했다. 아들은 한 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기 때문이다.

      

  중개사무소를 개업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3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듬해에는 50평형으로 이사를 하고 사무소도 집 근처로 옮겼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파트단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환경을 아들의 양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교 후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사도우미와 학습도우미를 두었다. 가끔은 지인들의 도움도 받았다.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주변에는 우리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물질의 축복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공인중개사 공부를 할 때 번개처럼 찾아와 나를 변화시켰던 그분을 믿고 따르다 보니 어느새 물심양면 부자가 되어 있었다. 부동산이 늘고 현금이 쌓여갔다.

      

  아들은 고학년이 되자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했다. 학교에서는 토론과 발표에 두각을 나타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덕분에 나는 여전히 학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엄마였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영재교육 추천이 들어왔지만 다른 아이에게 양보한다고 했다. 초등학교만큼은 독서와 예체능, 다양한 체험으로 일상을 즐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성적향상을 위해 지원하는 엄마보다, 사고와 시각을 넓힐 수 있도록 경험을 하게 해 주는 엄마가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삶에 여유가 생겼다.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계획했던 유학을 준비했다. 입시를 목표로 교과서에 갇혀 청소년기를 보내는 환경에서 생활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오래전 이민을 간 지인이 한국에도 괜찮은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입학금과 기부금이 상당하고 교육과정에 돈이 많이 들어 귀족학교로도 불리지만 경쟁률이 높아 아무나 입학할 수 없는 학교라고 했다.

 

  그곳은 기독교대안학교였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유학에 대한 생각이 사라질 만큼 괜찮았다. 아들과 함께 학교에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재학생들을 상대로 인터뷰도 했다.


  그곳의 커리큘럼은 공교육에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가득했다. 교육과정 중에는 유학을 보내려고 했던 국가에서 언어와 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다른 국가에서는 6개월 간 그곳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재학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마음에 들면 계속유학의 길도 열려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여러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이 들었지만 아들이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다면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경과 독서를 바탕으로 하는 학교였기에 아들에게는 최상의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오만 평 규모의 토지와 잘 꾸며진 아담한 건물들, 교육선교사라고 자부하는 교사들과 인성, 영성, 체성을 겸비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 선‧후배는 물론 교사와 학생들 간에도 서로 존댓말을 한다는 그 학교는 학생들을 세계적 리더로 양성한다고 했다.


  각 반의 정원은 12명이며 전원 기숙사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공교육에서의 따돌림이나 폭력 등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입학을 결정했다. 일을 하면서 내 수준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것보다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5학년이던 아들은 나에게 설득을 당해 입학에 동의했다.


  아들이 재학 중이던 학교의 선생님들은 우리의 선택을 만류했다. 담임선생님은 물론 교장, 교감선생님까지 나서서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대안학교는 대안학교일 뿐, 멀쩡하게 학교생활 잘하고 있는 아이를 왜 그런 곳에 보내려고 하느냐고 했다.


  나는 그때, 그분들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학부모들의 부러움 속에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던 아들에게 미안함을 넘어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입학에 동의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때 아들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입학 후 아들은 차츰 변해갔다. 밝고 씩씩했던 표정은 침울해졌고, 자신감 있던 목소리는 가라앉았으며,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을 회피했다. 주말마다 있는 의무외박을 마치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은 늘 마음이 아팠다. 학교생활이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찾자고 했지만 아들도 나도 선뜻 결정을 하지는 못했다.


  교사들은 아들이 잘 지낸다고 했다. 아이들의 언행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사춘기라 그럴 수도 있다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에서와 학교에서의 모습이 다르다고 했다. 교사들을 믿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아들이 의무외박을 하는 날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의 공연이나 스포츠 관람을 하면서 아들과의 대화를 늘렸다. 가고 싶다는 곳은 어디라도 데리고 갔다. 그럴 때면 표정이 밝아졌지만 이내 침울해지기를 반복했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교사들과 상담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였다. 선교사를 자처하는 교사들이 그렇게 해맑은 얼굴로 거짓말을 한다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대로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아들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 학업을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하고 싶은 공부를 끝까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있었기에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아들에게 결심을 말했다.

  “엄마는 네가 말해야 알 수 있고 청해야 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지 얘기해 주면 좋겠어. 그게 무엇이든 엄마가 힘이 되어줄게”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들에게 제안했다.

  “너랑 시합을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볼래? 그동안 엄마가 공부를 다시 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했어. 그런데 네가 기숙사에 있으니까 시간이 남더라고. 그래서 다시 해보려고 해.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시합을 하고 싶어. 우리 누가 더 공부 많이 하는지 내기할까?”

  아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나는 아들이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어 사춘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학도가 되었다. 아들은 얼마 후, 어학연수를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그곳 학교에서 좋은 친구와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다.


  6개월 후, 공항에서 귀국하는 아들을 보았을 때에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또한 학교생활이 시작되면서 점점 옅어졌다.

 

  의무외박 때 집에서 자는 날이면 비명을 지르며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팔을 잡고 있는 것이 이상해 만져보려고 하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들을 데리고 응급실로 갔다.


  진료를 끝낸 의사는 어깨가 탈골되었다고 했다. 초기에 치료를 받지 않아 증상이 심각하다고 했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왜 치료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제야 밤마다 비명을 지르며 깼던 이유를 알았다. 아들은 의사에게 캐나다에 있을 때 BMX를 타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 치료는 왜 안 받았느냐고 묻자 아무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비도 많이 들 것 같고 그냥 둬도 괜찮은 줄 알았다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날 이후 아들의 입을 통해 들은 학교생활은 충격 그 자체였다. 특히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엄마한테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걱정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나는 아들에게 당장 문제의 아이들을 처벌하고 학교에 대해서는 응당한 처분을 받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자고 했다. 그러나 아들은 반대했다. ‘엄마가 도와주면 학교를 변화시키고 싶다’고 했다.


  “우리 집에 불이 났다고 그 불을 담장 밖으로 던지면 다른 집이 타잖아. 그리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학교를 그만둬야 해? 엄마, 우리가 학교를 바꿔보자 응?”


  나는 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먼저 선생님들을 만나자고 했다. 나는 교사들을 만나기 전에 아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번에도 문제를 덮기에 급급할 거야. 그동안 엄마가 아무리 물어봐도 잘 지낸다고 하던 사람들이야. 여러모로 엄마가 볼 땐 학교를 통째로 사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 선생님들을 만나보고 그럴 의사가 없으면 그만두는 거야?”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교사들을 만났다. 내가 예상하던 대로의 답변이 나오자 아들은 실망했다. 학교를 떠나겠다고 했다. 대신 조용히 가자고 했다. ‘우리가 못하는 거 하느님이 하시도록 그냥 두자’고 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과 건물이 학교 입구 저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      


  자퇴원을 제출했다. 자퇴사유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 입학홍보자료, 입학선발기준, 학교설립이념, 교육목표와 방향이 알려진 사실과 상이한 학교.

2. 신앙 없이 사는 사람들의 인성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비정상적 공동체. 그러나 변화시킬 의지나 주체도 없는 심각한 공동체.

3. 대대적인 수술과 치유가 시급한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공동체.    

 

  학부모들한테는 게시판을 통해 떠남을 알렸다. 오랫동안 어머니대표와 운영위에 있으면서 기도모임을 이끌었고, 자퇴원을 제출하기 전까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맡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학부모들의 추대로 하게 된 일이었고,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는 기대 속에 다녔고, 다음에는 변화를 바라며 다녔고, 마지막에는 고통 속에 갈등하다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사유는 자퇴원의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자퇴사유서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는 남아있는 분들이 증명해 주세요.

  더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아 연락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이도 저도 지금은 휴식이 절실합니다. 당분간은 쉼을 위해 집을 떠나 있을 예정입니다. 또한 당분간은 학교와 관련된 어떤 사람도, 글도 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희를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이고, 저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덤덤하게 받아들일 날이 오면 다시 만날 날도 있겠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교통 했던 분들께는 감사드립니다.”      


  전화를 받지 않자 교사들과 학부모들로부터 편지와 이메일이 쏟아졌다. 연락을 하면 사실을 밝히고 폭발할 거 같아 무시했다. ‘남아서 변화를 시키든지 떠나려면 조용히 떠나자는 아들의 의사’를 수용한 것은 그곳에도 계실지 모를 하느님을 신뢰해서였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이메일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고통에 대한 모든 것을 하느님이 대신해주시리라 믿었다. 우리로 인해 진실로 아파할 사람들에 대한 위로까지도!

 

  아들은 그날을 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아들도 예전의 나처럼, 그런 신은 이제 안 믿겠다고 했다.  나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개신교를 떠나 가톨릭신자가 되었다. 아들의 어깨탈골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대안학교를 떠나던 날 아들은,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꿈에서 보았던 저수지 앞에서였다. 아들의 모습을 담아 셔터를 누르는데 저수지 가득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무지개는 특별한 순간에 보여주시던 약속의 말씀이었다. 어머니 장지에서도, 죽을 작정으로 서해대교를 건널 때에도 무지개를 보여주셨다. 그것은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무지개였고, 어느 정도의 시일이 지나면 축복으로 이어졌다. 무지개는 결정에 대한 확신이고 축복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유학을 가자고 했다. 아들은 외국어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홈스쿨링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아들은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대안학교에서 수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놓은 증서는 단 한 장도 발급받지 않게 하시고 주신 축복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아들은, ‘이제는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며 그 학교에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 방문사실을 알리고 아들과 동행했다.


  학교에는 역대교장부터 현재의 교장 및 교감, 그리고 교사대표 몇 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했고 더욱 교활해져 있었다. 회피하고 변명하며 울다가 예전처럼 ‘위하여 기도하자’고 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아들만 울지 않았다. 덤덤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돌아온 아들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아들은 재학 시 좋아했던 교사 몇을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리워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한 번도 그들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학교 측 대변인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아들과 나는, 학교가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문제를 잠재워야 할 폭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안다. 아들은 그렇게라도 그들을 이해해서 3년 6개월 간 숙식하며 함께했던 스승에 대한 배신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고, 그들은 그렇게라도 제자를 어르고 달래서 거기 살아남고 싶어 했다는 것을........      


  오래전 그곳을 떠날 때 받았던 편지 중, 교사와 학부모의 편지 각 한 통을 여기에 공개한다. 이는 오랜 고통에 대한 아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내 마음에 여전히 쌓여 있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덜어내기 위함이다.


  이 편지는, 학교에 대한 공격 때마다 나를 인내하게 한 처방전이다. 그들을 지금까지 거기 그대로 두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H교사     


  ‘이야기를 듣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만 그를 위로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에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네요. 배가 끊어질듯 한 아픔에 예수님도 울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그분은 정말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어머님을 위해, 나의 위로가 아닌 예수님의 위로를 간구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머님 만나고 싶었는데 용기도 없어서 전화도 못 드렸습니다. 면목이 없어서요.


  요즘 학교를 위해 기도할 때 공의가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님 사이에서 어느 땐 화를 내며 기도할 때도 있고, 어느 땐 안타까움에 간구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의라는데 그 공의를 위해서 말이에요.

나의 생각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그분의 공의, 온전하신 재판장이 오시기 전에 스스로 심판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듯 학교가 그렇게 되길 기도합니다.


  어머님의 아픔과 어려움을 그분이 알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그분이 왕으로 오셔서 어머님의 속상함을 갚아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제가 심판받아야 한다면 또한 대가를 치러야죠.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니까요. 어머님이 주께 의지하고 사랑한 것을 주님이 아시리라 그것이 감사합니다.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가르치신다)하신다는 말씀을 제가 그리고 모두가 들어야 하나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첫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는 샬롬이라는 말을 힘입어 다시금 어머님의 샬롬을 빕니다. 성령의 바람 가운데 치유되시길 다시금 기도하며 힘내시고 평안하세요.’   

 

  

Y학부모     


  ‘늘 언니로서, 리더로서, 이끌고 베풀고 섬겨 주심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서, 저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절망하고 힘들어하셨는데 모든 책임이 제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어요? 지금이라도 간절히 용서를 구합니다.


  이 일이 학교의 미래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이번 일의 모든 원인이 우리의 죄악과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서로를 용서해 준다면, 틀림없이 건강한 공동체로 세워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큰 어려움을 통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정말 잘 배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사람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믿었던 교회에 배신당하면 더 이상 좋은 신앙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상처는 받은 곳에서 치유함을 받지 못하면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지적을 정확한 지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다시 건강한 공동체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나는 이제라로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진실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예전의 활기를 다시 찾았다. 동아리활동도 열심히 했다. 글쓰기 대회에 참가해 상도 여러 번 받고, 친구들과 ‘이중 언어동화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책은 교육부 지원을 받아 전국의 다문화지원센터에 배부되어 비치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아들을 ‘작가’라고 불렀다. 나는 아들에게 붙여진 작가라는 별명이 탐탁하지 않았다.


  아들도 나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썼다. 중학교 때에는 주로 시와 소설을, 고등학교 때부터는 거의 전 분야의 글을 썼다. 나는 깊이가 남다른 아들의 글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직업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글을 써서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에게 글은 적당히 쓰고 진로를 탐구하고 결정하는데 집중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들은 알겠다고 하더니 느닷없이 랩을 하기 시작했다. 축제 때면 무대에 올라 종횡무진 그것을 풀어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보고 말했다.

  “세상에나! 시를 못 쓰게 했더니 가사를 지어 부르네?”


  아들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엄마, 내가 못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면서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건데 그런 거 가지고 뭐라고 하면 안 돼요. 글쟁이를 직업으로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잘할게.”  

  

  아들의 말은 대체로 옳다. 나는 아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다. 조금 아니다 싶은 것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물러서게 된다. 나보다 책도 성경도 훨씬 많이 읽은 아들을 논리적으로 상대해서 이길 방법은 없었다.


  아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외적으로는 밝았지만 불시에 나타나는 대안학교에서의 상처가 수시로 아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공교육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대응도 해결도 신속했다. 아들이 수시를 앞두고 있을 때, 이런저런 학교문제로 상심하던 학부모들을 대신해 교장선생님을 독대할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원서를 내야 할 시기에 다른 사람들 문제로 오지랖을 펴서 아들에게 불이익이라도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이 의무외박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문제를 의논했다.

  “엄마가 그 일을 하면 학교에 미운털이 박혀 네가 재수를 해야 할지도 몰라”

  아들이 말했다.

  “랐으면 몰라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나는 엄마가 결정하는 대로 따를게요. 재수해야 하면 하는 거지 뭐. 괜찮아요, 나는.”


  대안학교 입학을 마음대로 결정해서 낭패를 본 후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아들과 의논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공인중개사가 공인중개사를 사기 칠 때에도, 편의점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이 도둑으로 몰렸을 때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도 내가 “정의를 위하여 돌진?”하면 아들은 “옳소!”했다.     

 

  교장선생님을 만나기로 한 날, 어머니모임에서 아들과 나를 걱정하며 미안해했다.

  “입시가 코앞인데 다른 아이들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분이 불이익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는 말해도 안 들어주실 거 같아 드리는 부탁이지만 걱정이 돼요.”


  나를 운영위에 있게 한 어머니들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네요. 이럴려고 운영위에 보낸 거 맞지요?"

  심각했던 분위기가 잠시 밝아졌다.


  입시를 앞둔 부모의 심정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도 같다. 나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아파하는 아이들을 알고도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안학교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던 학부모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학교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그동안 회의를 통해 더러 대화가 오갔던 분이라 심각한 문제조금은 편하게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교장선생님, 제 아들 재수시킬 각오로 말씀드립니다. 학교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어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힘들어 하고 있으니, 살펴보시고 원만하게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학부모들의 우려와는 달리 교장선생님은 즉시 비상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당일저녁 전교생을 대상으로 무기명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문제의 심각성이 파악되자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졌고 학교는 다시 평안을 찾았다. 교장선생님이 고맙다고 했다.

 

  아들은, 졸업과 동시에 재수생이 되었다. 미운털이 박혀서가 아니라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우리는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날도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내가 경험한 공교육 교사들은 대체로 양심과 사명감이 있었다. 기독교대안학교 교사들도 그 정도의 양심이나 사명감은 있을 줄 알았다. 자칭 교육선교사라고 하는 그들의 성품이 일반교사들 수준에도 못 미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책임과 의무는 학교를 지키는데 국한됐고, 문제가 생겨도 드러날 때까지 은폐했다. 피해자의 사례 동의도 없이 다른 비슷한 학생들과 부모들을 다독이는데 이용했다.


  종교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항하는 것신께 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다루는 게 얼마나 쉬운지 그들은 알고 있다. 거기에 세뇌되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바람막이를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이리는 이리임을 숨기는데, 장님은 장님인 줄 모르는 격이다.  

   

  그 대안학교는 지금도 신입생을 모으기 위한 홍보에 열심이다. 거기에 적힌 호객행위와도 같은 문구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몰락을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를 할 때면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에서 다음 기도로 넘어가지 못해 울었다.

  나의 죄는 저들의 잘못을 용서할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조건부 기도라는 것을 알기에.......


  얼마 전, 찬양을 하다가 가사 한 구절이 심장을 관통하듯 가슴에 꽂혔다. 한두 번 불렀던 것도 아닌데 그날은 그랬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라는 대목에서다.

  “얘야, 나도 울었다. 나도 고통스러웠어. 그러니 나를 보거라."

  위로 평안 나를 감쌌다. 찬양을 출력해 벽에 붙여두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래,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지.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야.......’


   양육하기 버거운 시기의 부모, 세뇌하기 좋은 나이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종교를 이용해 교육사업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의 바람막이가 되어 그들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공동체와 사람인지, 진리 사랑의 가르침인지 돌아볼 일이다.


  학교가 설립목적을 상실하고, 교육자가 교육 외의 목적을 탐할 때 교육은 본질을 상실한다. 나아가 교육에 종교를 덧입히면 종교사업가는 수월하게 목적을 달성한다. 

  건강한 기독교학교라면 말씀으로 세뇌를 시킬 것이 아니라 변화를 시켜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기독교대안학교의 설립목적이다.


  지식이나 기술은 실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지만 인성과 영성은 아무나 가르칠 수 없다. 스펀지처럼 강한 흡수력에 리셋도 가능한 시기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정치든 종교든, 부모와 자녀들의 절박함을 이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복음 18장 12절-14절     


  재수생 엄마의 이야기와, 놀람의 연속이었던 대학생 엄마의 이야기는 아들과 나의 기억 속에 남겨두기로 한다. 언젠가는 그 이야기도 풀어낼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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