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파엘라 Oct 22. 2024

전세사기임차인 집단경매대행

병아리중개사의 쾌거

  근래 다시 전세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사기수법도 한층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주택공급초과 등의 이유로 건설경기가 침체되고 부동산시장에 한파가 몰아치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주택시장이다.

  그 중 임대차시장은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수면아래 잠들어 있다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예고된 재앙이다. 주택정책의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되풀이될 잠재적 재앙이다.


  처음 중개사무소를 개설하여 매수신청대리를 하던 그때에도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렸다. 중개경력 채 1년이 되지도 않았던 어느 날, 몇 명의 남자가 사무소에 찾아왔다.      

  그들은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가 부도가 났다면서 보증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계약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변호사 사무소에서는 채권자가 경매를 진행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임차인들의 사정은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탁등기가 되어 있는 아파트를 수탁회사의 동의 없이 시공사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임차인들이 입주를 한 후 시공사대표는 ‘처분금지가처분등기’를 한 상태로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시공사 대표를 찾아 말소등기에 필요한 서류를 받지 않고서는 경매신청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임차인들이 다녀간 후, 그들이 맡기고 간 서류를 검토하고 고민하다가 급기야 그 일을 해보기로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해보고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해보지도 않고 이웃의 절박함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부도아파트 단지 내에 설치된 ‘SH아파트임차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회의에 참석했다. 그들의 의견을 취합해 계약서를 분류하고 선순위임차인, 후순위임차인, 권리 없는 임차인으로 나누어 개별상담을 했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지 않은 임차인은 순위와 관계없이 즉시 받아놓으라고 했다. 많은 이가 ‘변호사도 못하는 일을 병아리 중개사가 할 수 있겠느냐’고 비웃었다.

 

  먼저 법무사를 선임했다. 법적으로 중개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임한 법무사에게는 경매가 진행되면 낙찰물건 전부에 대한 이전등기업무와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그는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친분을 쌓은 여성법무사였다.

    

  나는 시공사 대표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매번 허탕을 쳤다. 어느 날, 한 채권자로부터 관련자들이 광화문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다짜고짜 법무사를 차에 태우고 광화문으로 갔다.


  그곳에는 생소한 간판이 걸려있었고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가 우리를 경계하며 방문이유를 물었다. 대표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자기들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다 알고 왔다. 경찰을 불러 사실여부를 밝히든지 경매를 진행할 수 있도록 인감을 내어주든지 결정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던 중 한 남자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임차인들과는 어떤 관계세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나를 보는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를 보았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겁에 질린 마음을 감추고 씩씩한 척 소리치다가, 생뚱맞은 질문과 함께 보게 된 남자의 미소에 긴장이 풀렸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지금까지 말싸움을 벌였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른 남자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비대위에서 왔겠지!”

  나는 그렇다고 했다. 중개사라고 하면 상대도 안 해줄 것 같아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기로 작정했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의 자문자답 덕분에 내 입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냥은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권하지도 않은 소파에 앉았다. 법무사도 나를 따라 소파로 왔다. 인감을 내어줄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얼마쯤 그렇게 있는데 ‘비대위에서 왔겠지’라고 말하던 남자가 잠깐 따로 보자고 했다.      


  남자는 칸막이가 있는 구석진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자기들이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다가 이내 ‘경매를 신청할 임차인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나는 준비해 간 임차인명단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들여다본 남자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 있다가 처분금지가처분등기 말소에 필요한 대표인감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법무사를 불렀고 법무사는 순식간에 필요한 서류에 모두 도장을 찍었다. 우리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그런 순발력 있는 법무사를 선임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남자는 본의 아니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 ‘다음에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병아리중개사인 나를 믿지 못해 의뢰를 하지 않은 임차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법무사가 말했다.

  “중개사님은 뭘 드시고 그렇게 용감하세요? 나는 겁이 나서 조마조마했습니다.”

  “저는 법무사님처럼 과일도 잘 먹지만 당근도 잘 먹습니다. 그런데 법무사님은 뭘 드시고 그렇게 순발력이 탁월하세요? 저는 감동받아서 울 뻔했습니다.”


  우리는 크게 웃었다. 더없이 기쁘고 뿌듯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지레짐작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거나 도중에 포기했다면, 이런 기쁨과 성취감은 평생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대위에 참석해 결과를 알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식을 기다리던 임차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순위와 후순위, 낙찰을 받을 임차인과 배당받을 임차인을 분류해 배당요구 신청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매에 필요한 임차인들의 모든 서류를 준비해 법무사에게 건넸다.


  경매개시결정이 떨어지던 날, 믿지 못해 동참하지 않았던 임차인들이 사무소로 몰려왔다. 경매에 참여한 임차인들은 갖가지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사무소에는 보약에서부터 과일에 이르기까지 선물이 넘치도록 쌓였다. 직원들과 나누고, 이웃들과 나누며 두고두고 기쁨을 만끽했다.    

  

  경매가 시작되자 변호사와 법무사들 사이에도 소문이 돌아 나는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렇게 말했다.

  “저도 제가 한 일이 놀라울 뿐입니다. 자격증을 받고 어느 분과 약속한 게 있는데,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네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신의 도움이 아니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근래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전세사기를 보면서 다시 오지랖을 넓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인지를 알기에 충동을 누른다.      


  주택시장이 침체되고 미분양이 속출하면, 건설사는 잔여세대를 일정기간 임대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때 신탁등기가 되어 있는 아파트를 시행‧시공사나 분양대행사 등과 계약을 하면 권리 없는 자와의 계약이 된다. 유사시 임대차보호법은 물론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다. 소유권이 신탁회사에 있기 때문이다.

 

  설마 시행‧시공사나 분양사무소에서 사기를 치겠느냐는 생각은 금물이다. 근래 등기법으로 사기를 당한 임차인들과는 다른 종류지만, 임대차시장에 존재하는 흔한 사기수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탁등기가 되어 있는 부동산의 소유권은 수탁회사에 있다. 신탁자에게는 신탁약정해지를 원인으로 수탁회사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할 계약상의 권리만 있다. 물론 이러한 권리는 신탁자가 약정한 대출 등을 수탁회사에 모두 갚은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신탁등기가 되어있는 부동산을 수탁회사의 동의 없이 소유자와 계약을 하면 권리를 보호받지 못한다. 신탁등기가 되어 있는 부동산은 등기부상 소유자라고 해도 타인의 부동산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임대차계약을 할 때에는 반드시 신탁등기를 말소해야 한다. 어떤 임대인은 ‘보증금을 받아서 말소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임대인이 보증금을 받은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고가 나는 일도 종종 있다.

     

  신탁부동산의 등기부는 신탁물건지 등기소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등기부에는 ‘임대를 놓으려고 하는 경우 수탁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 집을 소유자와 직접 계약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몰랐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이 없다.      


  전세사기를 예방하는 첫걸음은 등기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등기법을 그대로 두고 임차인보호를 말할 수는 없다. 철석같이 믿고 권리관계를 확인하는 등기사항증명서가 공신력이 없다는 것은 모순이다. 담당자에게는 등기부에 기재되는 내용의 사실여부를 철저히 검증하게 해야 하며, 그것을 해태한 사람에게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대부분은 젊은이들이다. 국가기관에서 발급하는 장부가 공신력은 없고 공시의 효과만 있다는 것을 아는 국민은 드물다. 그로인해 발하는 문제의 책임을 국민에게 돌리는 정부는 무능하다.

  더 이상 피해를 보는 국민이 없도록 등기법은 개정되어야 마땅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방에 초점을 두어 보다 확실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전 10화 중개보수가 아니라 정(情)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