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파엘라 Oct 22. 2024

돈키호테엄마의 수필

레드카드 카운트다운 外

레드카드 카운트다운     


  멀리서 반가운 손님들이 왔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이미 간월도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앞서가던 서너 대의 차량을 무심코 따라간 지 얼마나 됐을까? 하나둘 차들이 불빛을 흐리며 샛길로 빠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것은 한참을 더 지나서였다. 저수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가 백발처럼 휘감아 돌며 시야를 가렸다. 폐건물과 무덤에서는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듯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길,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닌 듯 차는 자꾸 앞으로만 내달렸다.

     

  나는 왜 앞서가던 차들이 나처럼 간월도로 간다고 철석같이 믿었을까? 겁에 질려 차를 돌릴 엄두도 못 내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 모두 안개 속에 숨어서 내가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거부하는 것도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자 살면서 지은 죄, 저지른 잘못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한 번쯤은 잘했다고 생각될 일도 있을 텐데, 그런 기억은 도무지 없고 용서를 구할 일만 꼬리를 물었다.

 

  잘못인 줄 알면서 되풀이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만약 지금까지의 삶으로만 나를 평가해 지옥으로 보낸다면 억울해서 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무리하지 못한 현재진행형인 일들의 결과 또한 나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했기에 이렇게 도중하차로 삶이 멈추는 불상사는 어떡하든 막고 싶었다.

      

  언젠가 송년회가 끝나고 귀가하던 새벽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굽잇길을 운전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서해대교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진입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이 금방이라도 차와 함께 내 몸을 바다로 밀어 넣을 것만 같았다. 차선을 바꾸고 속도를 늦춰도 차체의 흔들림엔 변함이 없었다.

  오가는 차량이라도 있으면 위안이라도 될 텐데 그 시간 서해대교에는 내 차만이 홀로 폭풍 속에 휘청댔다. 그대로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민들레를 건네주던 아들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들의 정다운 모습도 떠올랐다. 잘해준 마음이나 좋은 기억보다 못해준 일들만 가슴을 때렸다.

  무사히 다리를 건너 소중한 이들을 다시 만나면 가장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쉬움을 줄이고 후회를 줄이리라 다짐했다.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만 있다면.......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이곳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이다. 두려움에 떨며 서해대교를 건너던 그날은 예기치 못한 폭설에 폭풍까지 몰아쳤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비슷한 공포 속에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후회를 하고 있다.

  서해대교를 건널 때 그렇게 많은 다짐을 했으면서 실천하지 못하고 이렇게 다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몸부림이라니 아, 나는 얼마나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


 “왜 이렇게 늦어요?” 휴대전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전화생각을 못한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랬다면 바로 도움을 청했을 테고 이렇게 앞으로만 내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아무도 물어가지 않았는데 정신을 놓은 꼴이다.

      

  차를 돌려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을 땐 기운이 빠져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간 그곳은 ‘산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간월도 가는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런 길로 빠질 수는 없었다.

  의심 없이 따라갔던 몇 대의 차량, 유혹하듯 앞서가다 샛길로 빠진 그 차들이 정말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 예기치 못한 사고가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만은 예외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삶을 다하는 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으면서 준비 없이 사는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그러나 똑바로 살라는 경고를 거듭 받고도 잘못을 되풀이 한다면, 그땐 영원히 세상에서 퇴장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폭풍 부는 날 서해대교 건너지 말기, 눈 오는 날 굽잇길 가지 말기, 어둠 속에서 앞차 따라가지 말기’하는 식의 얄팍한 마음 또한 버릴 일이다.

      

  비우고 버리고 나누고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불시에 세상과 작별하게 되어도 두려움 없이 떠나기를 바란다면,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얻는 행복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나의 수고가 선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기쁘고 감사히 여길 일이다.

  

  병든 육체에서 오는 두려움, 정신을 빼앗긴 상태에서 오는 공포, 그것은 모두 삶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다. 인간이 한계를 인정하고 가장 겸손해지는 순간, 나는 그것을 레드카드 카운트다운에 경험했다.

  


너와 나를 너머 우리로 가는 길     


  기원전 13세기경, 애굽의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인이 권력을 잡을 수 없도록 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한다. 이에 모세의 어머니는 3개월이 된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기슭 갈대 사이에 둔다.

  그런 모세를 애굽의 공주가 발견해 궁으로 데려가 아들로 삼는다. 파라오의 폭정을 피해 버려진 모세를 파라오의 딸이 신분을 감추고 애굽의 왕자로 키운 것이다.


  궁에서 왕족으로 살던 모세는 40세가 되던 해 이스라엘인을 학대하는 애굽 병사를 죽이고 광야로 달아난다. 그리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보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킨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던 해였다.

 

  죽이려고 쫓아오는 애굽의 병사들과 괜히 따라나섰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모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 홍해의 갈라짐을 경험하며 240만이라는 거대한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한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일강으로, 나일강에서 궁으로, 궁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에 이르기 전까지 펼쳐졌던 소명에 따른 대장정! 죽음의 위기에서 왕자로, 왕자의 신분에서 양치기로, 양치기에서 민족의 영웅이 되기까지 경험했던 그의 역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애굽에서 탈출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백성들과 함께 40년을 유랑하다가, 120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난다. 모세의 뒤를 이어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백성들을 이끈 것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우리에게도 국가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5년을 주기로 돌아온다. 선거철이 어김없이 벌어지는 정치판의 이전투구를 볼 때마다 모세를 생각한다.

  분단을 이용해 위기를 조장하고, 정죄와 편 가르기로 국민을 선동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정의를 논하고 공정을 주장한다. 그들은 문제해결이 아닌 갈등을 증폭시키 평행선을 고수한다.


  정의와 불의, 애국자와 매국노가 시대나 유익에 따라 뒤집힐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그 무엇도 영원한 정답이 될 수 없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정치와 종교는 진영과 교파에 매몰되면 오염되고 훼손되어도 비판이나 떠남을 모른다. 그들에게 비판이나 떠남은 곧 배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버려야 할 것 버리는 것은 정도를 따르는 것이지 배신이 아니다.

 

  지지자가 세력이 되어 정치인을 좌지우지하고, 그런 지지자들을 의식해 무지렁이가 되는 정치인, 그들로부터는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이 나와도 국민의 허기와 갈증 해소되지 않는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망 안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살찌울 뿐이다. 모세와 같이 민족을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위대한 지도자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무기 하나 없이 무장한 군대를 따돌리고 죽음의 땅을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도 한 번쯤은 여야를 떠나 그런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국민 다수에 의해 선출된 국가의 수장이 임기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에나 당연하게 볼 수 있을까.

  또한 다수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 임기가 끝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정치인의 의무는 민생을 돌보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며 국가의 안녕을 꾀하는 것이다. 정권을 유지하거나 빼앗기 위해 복수혈전을 되풀이 하면 의무는 뒷전이 된다. 그런 이유로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

  가뜩이나 분단 된 국가에서 첨예한 양극의 분열을 지속적으로 보아야 하는 국민은 피곤하다.

    

   ‘내가 만약 그라면 어떤 마음으로 거기에 있을지, 그가 만약 나라면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있을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너와 나를 너머‘우리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18화 돈키호테아들의 시와 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