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중 꽃들의 잔치, 몽골 초원의 야생화)
여름이 한창인 어느 날, 충남 보령 아래쪽에 위치한 무창포해수욕장을 찾은 적이 있다. 먼 길을 돌아 입구로 들어서는 도로 양 옆엔, 아기자기한 나무가 분홍빛 꽃을 달고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가의 여러 나무가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차를 세우고 살펴보니, 백일 동안 꽃이 핀다고 하여 '목백일홍'으로 이름이 붙여진 아름다운 꽃나무였다. 일명, '배롱나무'로 불려지는 나무였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뜰에는 갖가지 꽃을 심어 일 년 내내 꽃을 보며 살고 있다. 초봄 꽃잔디가 피기 시작하면 영산홍, 철쭉에서 부터 가을의 구절초와 달맞이 꽃, 국화까지 상당히 많은 종류의 꽃이 시골집의 식구들이다. 아내는 꽃이 피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며 풀조차도 키우려 하고 있어 가끔은 언쟁을 하기도 한다. 민들레도 꽃이 피면 예쁘다면서 기르고, 개망초 꽃도 괜찮다면서 뽑기를 주저하고 있고, 뒤뜰에는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화단을 비롯한 울 뒤에도 많은 꽃을 심어 보기 좋지만 아내는 '목백일홍' 꽃을 벌써부터 보고 싶어 했다. 그것도 잘 보이는 곳에 심어 기어이 꽃을 보고 싶단다. 봄이 오고 나서 못 이기는 척하며 묘목시장엘 들렀다. 나무 아래부터 가지가 자라 풍성한 꽃을 볼 수 있는 것을 찾았지만, 대개는 사람 눈높이 정도의 위치에서 가지가 나와 꽃이 피도록 전지를 해 놓아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해 놓은 이유는 가로수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그렇게 키웠다는 것이고, 그런 나무는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풍성한 꽃을 보기 위해서는 전지를 해서 다시 기르면 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전문가의 솜씨로 전지를 하고 나무를 구입하여 화단 앞에 심었다. 잘 보이는 곳에 정성 들여 나무를 심었지만 전지를 해서 심었기에 우선은 볼품이 없다. 문제는 전지를 해서 볼 품이 없는 나무가 봄이 지나도 싹이 돋지 않는 것이다. 혹시, 전지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서늘한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나무는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던 줄기는 여러 곳에서 시샘하듯 새싹이 나와 제법 그럴듯하게 되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자그마한 새싹이 30cm 정도가 되었지만 이제는 꽃이 피지 않아 걱정이 된다. 옆집의 목백일홍은 풍성한 꽃을 피웠는데 도대체 꽃이 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보니 여름이 깊어지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짓궂은 장마가 한 달이 넘도록 심술을 부리고 있어 많은 꽃들이 망설이다 용기를 냈는지 꽃 피우는 것을 쉬질 않았다. 뜰에 있는 여러 가지 꽃들이 긴 장맛비 속에서도 선전 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도 하다. 화단 가에는 비벼서 나물을 해 먹는다는 '비비추'가 자줏빛 꽃을 피우더니, 자잘한 '벌개미취'도 보랏빛 꽃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큰 옹배기에 심은 '산나리'가 껑충하게 자라나 화려한 꽃을 피웠고, 키가 너무 커 구박을 받던 '황겹매화'가 노란 꽃으로 치장을 하고 '루드베키아'와 질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호박보단 화초로 기르고 있는 긴 덩굴의 호박이 밝은 꽃을 피워 동네 벌을 모으고 있고, 길가에는 '메리골드'가 배시시 꽃을 달고 있다. 짓궂은 장마에 지칠 대로 지친 채송화가 붉은 입술로 화단을 밝히더니, 때늦은 수국이 하얀 꽃을 피워 여름 화단에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화려한 부용화는 분홍빛 저고리에 하얀 치마로 요염한 옷을 차려입었고, 화단 구석에 엎드려 있던 '닭의 장풀'도 장맛비 속에 자줏빛 꽃을 피웠다.
장맛비 속에서도 꽃들의 향연이 시작되었지만, 기나긴 장마가 시골집을 울적하게 만들어 장맛비에 정신을 쏟는 사이, 드디어 고대하던 목백일홍도 슬며시 꽃을 피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내가 기다리던 목백일홍이 분홍빛 꽃을 피운 것이다. 기나긴 장맛비를 맞으며 꽃이 피어서 그런지 조금은 싱싱한 맛이 없었지만, 여러 줄기에서 분홍 빛으로 꽃을 피워 나무를 붉게 물들였다. 한 여름 장마철에 꽃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지만 이왕 피었으니 적어도 100일은 피워 화려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커다란 목백일홍이 어렵게 꽃을 피우는 사이, 화단을 가득히 메운 수십 그루의 '꽃범의 꼬리'도 몇 개의 보랏빛 꽃으로 여름 꽃잔치에 참여했다. 여기에 뒤질세라 성급한 코스모스도 진빨강의 꽃으로 가을을 재촉하고 있으며, 산 언덕에 가득한 '달맞이꽃'도 한껏 키를 불려 노란 꽃을 피우고 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화려하던 '서양톱풀'은 씨앗을 맺기가 힘들었는지 아직도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으니 '일본 조팝나무'도 언제 꽃을 피울까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화단에는 남은 꽃들이 장마가 그치고 가을이 오길 고대하고 있다. 장맛비가 멈추고, 밝은 햇살이 찾아오면 아직도 자라는 중인 고고한 하얀 구절초와 가을의 꽃, 다복한 국화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게으름을 피우던 코스모스도 합류할 테고, 거기에 화려한 '공작단풍'이 날개를 펴 수를 놓으며 꽃잔치를 한껏 빛나게 하리라. 밝은 가을 햇살이 오는 날 벌어지는 꽃잔치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맴을 돌고 덩달아 가을빛으로 물든 하늘이 내려오면, 여름은 아쉬운 듯 가을 자리 내어주고 뒷걸음질 칠 테지만, 아직도 짓궂은 장맛비가 남은 여름의 꽃잔치를 시기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