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의 추억과 생각(남인도, 알레피에서 만난 풍경)
잠결에 들리는 소리는 엄청난 비가 오는 소리이다. 오랜 기간 계속된 장마에 또 비가 오는가에 조금은 불편한 심기가 배어난 소리로 아내에게 얼른 문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허겁지겁 창문을 열고 보니 하늘엔 구름만 끼었고, 비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뜰 앞 조그만 도랑에 물 흐르는 소리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폭포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시사철 졸졸거리던 앞 도랑이 지루한 장맛비 덕분에 풍성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골 동네를 호령하고 있다. 작은 도랑은 넘치도록 흐르는 산골물에 몸부림이라도 치듯 한껏 소리를 지르고 있다. 장마, 장마라고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찔끔거리는 빗줄기가 요즈음은 야속하기도 하다. 어쩌다 나온 햇살을 금방 밀어 제치고 비를 또 퍼붓는다. 참, 올해는 유난히 긴 여름 장마이다.
'장마'의 유래를 찾아보면, 여러 곳에서 대부분 '장 (長) + 맣'로 설명하고 있다. 장마에서 '長'은 '긴', '오랜'이란 뜻을 가진 한자어이고, '마'의 물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맣'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오랫동안 내리는 비를 뜻한다. 대신, 이웃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매화가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 해서 '梅雨'라 표현하고 발음만 다르다고 한다. 장마철이니 비가 오고 대지를 적셔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비에 대한 기억은 참 아름답고도 고마운 이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비에 대한 기다림은 누구보다도 간절했었다. 모진 천수답의 자갈논에 물을 대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여웠고, 그 자갈을 헤집으며 모를 심는 부모님이 처절하도록 고마웠다. 그래서 가뭄에 단비가 내리면 언제나 고마운 비였고, 그 비는 종일토록 맞아도 좋은, 한이 서린 감사한 비였다.
비가 오지 않아 논 바닥이 쩍쩍 갈라지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모으려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으셨고, 가뭄이 계속되면 자갈논을 비집고 호미모를 심는 부모님이 그렇게도 대단하게 보였었다. 이렇게 기다리는 비가 내렸으니 철부지인들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장대 같은 비가 내려도 어머니는 언제나 새참을 이고 논두렁을 찾으셨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 밑에 앉아 허기진 배를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마운 비가 내렸기에 물길을 찾으려 고단한 몸을 부려야 하는 아버지의 고단함을 덜어 줄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렇게도 바쁜 농사일이 지나고 장맛비가 내리면, 시골집은 고요한 적막에 휩싸였다. 툇마루에 고단한 몸을 뉘이고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 모습이 그랬고, 눅눅한 땔감으로 군불을 지피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그랬다. 잠시 비가 잠잠해지면, 감나무 잎에 머물다 가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노곤한 오후를 일으켜 주었다. 초가지붕 골을 따라 빗물은 조용히 흐르며 여유를 즐기고, 골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은 대지에 다달아 환호성을 지른다. 고즈넉한 시골집에 다다른 빗물은 커다란 물줄기에 몸을 실어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유유히 흘러가곤 했다.
봄비 소리가 반갑고 여름 비가 고마웠던 시절이 지나고 시골살이를 하며 만난 장맛비는 맛이 달랐다. 한 발짝 뒤에서 만난 빗소리는 그립고도 고마운 우리의 손님이었지만, 시골살이의 시작과 끝은 식물들과의 만남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비와의 만남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가끔 내리는 비는 고맙기 한이 없고, 녹음을 적시어주는 비는 호젓한 한낮을 선사해 주어 좋다. 느닷없이 내리는 소낙비는 앞산 머리 바라보게 하는 마력이 있어 반갑고, 봄에 내리는 비는 시골 동네에 사람 살고 있음을 알려주어 좋다. 그러니 그 비는 나의 몸이었고, 누구의 손님이 아닌 나의 손님이 되었다.
시골살이는 식물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들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기에 언제나 나의 한 식구처럼 돌보아야 한다. 뜰을 감싸고 있는 잔디밭엔 비가 와야 하고, 대여섯 평 밭에도 비가 와야 풍성한 내 식구가 살 수 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을 보며 비를 달라하고, 그래도 오지 않으면 물은 주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영리한 식물과 대지는 잘 알고 있다. 이물이 빗물인지 아닌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받아들임이 다르고 성장이 다르며 대지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 내 손님이 알맞게 와야 하고 적당이 가야 하지만 올해는 전혀 다르다.
고마웠던 나의 손님이 올해는 긴 장마가 되어 너무 길게 심술을 부린다. 신비스러운 자연의 섭리에 취해 아침저녁으로 텃밭을 드나들어 어엿한 밭이 되었건만, 심술궂은 장맛비는 푸르른 밭 모양을 헤집어 놓고 말았다. 가느다람 모종을 심어 여름내 잘 가꾸어 놓은 대파를 그르쳐 놓았고, 얼마 전에 심어 놓은 열무와 가을 상추를 몹쓸 모양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거기에 당근 씨를 뿌려 실 같은 모종이 나왔지만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여름 장마는 그냥 두지 않는다. 하루 종일 비를 맞는 모습이 처량하게 보여 가느다란 막대기를 바치고 비닐을 씌워주며 안심을 하려 하지만, 스며들어 넘치는 물기는 막을 방법이 없다. 햇살이 비추려고 하면 비닐을 벗기고, 비가 오려고 하면 비늘을 덮는 일도 이제 지쳐가고 있다.
기천원이면 사다 먹을 수 있는 상추와 열무다. 하지만 시골에 살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땅이라고 생긴 곳에 씨를 뿌리고, 아침저녁으로 돌보아 주면 언젠가는 작은 싹이 솟아나는 모습은 너무 신기하다. 씨를 뿌리고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땅이 갈라지면서 대지가 볼록하게 솟아오른다. 차츰 땅에 균열이 커지면서 작은 새싹은 연한 녹색으로 머리를 감고 머리를 내민다. 수줍은 듯 올라 온 새싹은 아침이슬에 젖어 맑은 빛을 반사하는가 했는데, 어느덧 키를 불려 푸름으로 대지를 수놓는다. 그러니 이 신비함과 낭만을 멈출 수가 있겠는가?
잔디밭 가에 느닷없이 자리한 긴 호박 줄기는 처량해 볼 수가 없다. 긴 호박 덩굴에는 드문드문 암꽃을 피워 작은 호박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장마가 길어지면서 호박을 매단 암꽃은 어느새 누런 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이웃에 피었던 수꽃이 짓궂은 장맛비에 피질 못하고 곧 떨어지는 비운을 맞았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길어지면서 찾아오는 벌도 없어 외로이 피어있던 암꽃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장맛비에 나뒹구는 조막만 한 호박을 보면서 긴 장마가 걸음을 멈추길 오늘도 하늘 보며 눈을 흘기지만, 미움 살까 두려워 얼른 눈 감았다.
긴 장마가 물러갔는지 오늘은 햇살이 따갑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자 도랑물 소리가 아직도 우렁차게 들린다. 서서히 시골 동네의 커다란 '시골극장' 공연시간이 된 것이다. 도랑물이 인사를 하고, 이웃집 닭이 울어대기 시작하면 극장의 막이 오르고, 서서히 이웃들의 발걸음이 시작된다. 고추와 오이를 따러 밭으로도 가고, 물이 찼던 논물을 보기 위해 논두렁으로도 발길이 이어진다. 긴 장맛비에 어깨를 늘어뜨렸던 널따란 담뱃잎도 정신을 차렸다. 이제 짓궂던 장맛비도 물러가고 푸르른 들판이 서서히 영글어 갈 것이다. 그러면 뜰앞에 심은 구절초가 하얀 꽃을 피우고, 노란 달맞이꽃이 달을 맞이하는 성스런 가을맞이가 시작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