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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를 밝혀준 꽃범의 꼬리

(장마가 준 상처, 헝가리 세체니 다리의 야경)

by 바람마냥

기나긴 장마, 코로나 19가 세상을 어렵게 만드는가 했는데 그와 치열한 잔불 정리를 하고 있는 지금, 또다시 장마가 세상을 괴롭히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이때나 저때나 멈추길 기대했지만, 장마의 긴 꼬리는 감출 줄 모르고 기어이 발톱을 드러내고 말았다.


남도가 그리우면 찾아가던 화개장터가 물에 잠기고, 그렇게도 점잖은 듯한 섬진강이 범람하여 온 동네에 물이 흘러넘쳐 난리가 났음에 가슴 저려옴이 아쉽기만 하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서 지리산을 거쳐 내려오는 녹음이 섬진강까지 물들이는 곳, 매실이 꽃을 실어 섬진강에 흩뿌리는 전경이 아름다운 곳에 이 무슨 난리라는 말인가? 천정까지 들어찬 물을 보고, 지붕 위에 올라 무심한 듯 장맛비를 바라보는 소떼를 보면서 어떻게 손을 쓰고 정리를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 곳곳에서 물이 흘러넘쳐 일 년 내내 흘린 땀의 결실이 허사로 되어 버렸으니 어쩌란 말인가? 거기에 소중한 목숨마저 앗아가 버린 장맛비가 코로나 19가 할퀴고 간 흔적을 또다시 짓밟아 버려 모두가 할 말을 잊어버렸다.


깊은 산골에 둥지를 틀고 봄이면 나물을 뜯어 장터를 찾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장터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감에 숨이 멎어버렸다. 넓은 광장이 흙탕물로 가득하고, 푸르른 물이 점잖게 흘러 언제나 푸근하고 그리움을 주던 그 섬진강 물이 화가 난 듯 밀려들어옴이 섬찟하기만 하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달려보던 구례장터가 그렇고, 섬진강을 둘러싸고 그려진 그 길들이 물로 가득하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빗소리를 들으며 감상에 젖어보고, 먼 하늘에서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줄기에 반해 한참을 바라본 그 빗줄기가 이제는 엄청난 재앙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며칠만 비가 오지 않아도 하늘을 보며 원망을 했고, 그 사이를 참지 못하는 꽃들을 보며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어야 했다. 그런 꽃과 나무들이 하루 종일 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뭇잎으로 떨어진 빗줄기는 잎새에 머물 사이도 없이 흘러내리며 오늘도 진저리를 치고 있어 이내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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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토마토는 한 잎의 잎사귀도 없이 완전히 장맛비에 손을 들고 말았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한 잎 두 잎이 검게 변하더니 어느새 모든 잎이 완전히 상해버렸고, 앙상한 줄기만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파릇한 싹이 돋아나 올망졸망 토마토를 달고 있던 그 나무가, 작은 바람에도 사르르 몸을 떨던 그 잎이 처절하도록 내리 붓는 빗줄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나 보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줄기에 토마토만 달랑 매달려 몸부림을 치고 있고, 삐죽이 올라오던 열무잎은 벌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길어지는 장맛비를 막아주기 위해 덮어준 비닐도 소용이 없었는지 장맛비를 견디지 못하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봄부터 화단가에는 알 수 없는 호박씨가 떨어져 가냘픈 싹이 돋아났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호박을 어떻게 할까를 망설이다 꽃이라도 보고 싶어 그냥 기르기로 했다. 그러던 호박 줄기는 하루에 한 뼘을 넘게 줄기를 불리더니 기어이 화단가를 빙 돌도록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즈음에 장마가 시작되고 줄기찬 장맛비는 그 꽃도 그냥 두질 않았다. 새벽바람에 배시시 웃던 호박꽃은 장맛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예쁘게 매달렸던 호박도 어느새 땅바닥에 뒹굴며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IMG_E7314[1].JPG 꽃범의 꼬리

하지만, 장맛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역할을 해주는 꽃이 있어 다행이다 싶다. '꽃범의 꼬리', 꽃이 핀 모양이 범의 입과 같고, 아래 부분은 범의 꼬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꽃범의 꼬리'가 넉넉한 꽃을 피워주어 고맙기도 하다. 이름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뜰 앞에 있는 수십 포기의 꽃범의 꼬리가 장맛비를 맞아가면서도 옅은 분홍빛 꽃을 활짝 피웠다. 잔디밭에는 장맛비가 그득하지만 당돌하게 버티면서 꽃을 피워줌이 그나마 대견스러우면서도 우울한 화단에 다행이다 싶다.


오늘도 여지없이 줄기찬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뜰앞을 흐르는 자그마한 도랑에는 빗물이 모아저 엄청난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다. 풀들이 고개를 숙였고, 나뭇잎이 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서 이 장맛비가 그치고 밝은 햇살이 솟아나 그 전의 일상으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뻘건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계곡물 위를 외줄에 몸을 맡기고 인명을 구하는 구조대원들의 사투, 물가에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려는 구조대원의 치열한 몸부림이 헛되지 않길 바라며 그들이 무사 안녕을 간절히 빌어본다. 나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돌보는 모든 이들과 상처 받은 이들의 상처가 빨리 치유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의 삶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그들의 노력이 화단 한 모퉁이에서 꽃을 피운 '꽃범의 꼬리'처럼 물난리를 만난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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