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향 가득한 동네

(포도밭에서 만난 사람, 남아공의 와이너리에서)

by 바람마냥

사는 동네 근처에는 비스듬한 산자락을 언덕 삼아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많았다. 산행을 하다 더위에 지쳐갈 무렵 길가를 걸어가노라면, 달콤한 포도 냄새가 발길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곳이다. 아내와 가끔 산책을 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포도 집은 언제나 그리운 추억을 안겨주곤 했다. 지나는 사람 앉혀놓고 무작정 포도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혼자 마시던 막걸리를 권하신 아저씨는 어느새 술에 취하기도 했었다. 안 사도 좋으니 앉아서 포도나 먹고 가란다. 그것도 한 송이를 먹고 나면 다시 한 송이를 건네준다. 산에 올라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 올 무렵엔 여지없이 찾아 시골냄새 맡으며 '쉼'을 하고 오곤 했었다.


하지만 도시 근처의 포도밭은 개발이라는 허울이 그냥 두질 않았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더니 어느새 붉은 깃발이 경계를 표시하며 선이 그어졌다. 개발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들썩이기도 했다.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사수하려는 몸부림도 있었지만, 이번이 호기라는 생각이 없을 리가 없다. 이런저런 공론 끝에 개발은 결정이 났고, 어느 순간부터 괴물 같은 장비들이 녹음이 진한 산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드디어 산을 반토막으로 잘라 놓더니 그 위에 기다란 길을 놓고, 여기가 산인지 들판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곳으로 만들고 말았다.

편안함을 주는 와이너리 풍경

어느 날 찾은 포도밭에 꽂아놓은 붉은 깃발을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대한 괴물들이 오가는 모습이 그렇게도 낯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힘없이 허물어지는 산을 외면하며 살다가 일 년이 지나 오래 전의 산책길을 찾았다. 동네는 반토막이 나서 개발과 미개발의 극명한 대조를 일부러 보여주는 듯했다. 개발이 된 곳엔 어머어마한 아파트가 들어서 불야성을 이루는가 하면, 개발되지 않은 곳은 우리의 오랜 시골마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오래전에 만났던 그 추억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망설임이 발길을 잡아 놓았었다.


오늘 갑자기 그곳의 포도가 그리워졌다. 아내에게 포도밭엘 가자 했더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바뀌어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탓이다.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며 찾아간 포도밭 동네는 조금만 남아 아직도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간 김에 포도를 사러 오래전에 다니던 집으로 들어섰다. 포도 집엔 오래전에 농사를 짓던 사람이 아닌, 젊은 부부가 포도를 손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며 주인을 찾았더니 아버지는 포도를 따고 계시고, 자신은 아들과 며느리란다. 오래전 생각이 나서 포도를 사러 왔다고 하니 포도를 몇 송이 내놓으며 먹어 보란다. 쭈뼛쭈뼛하고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자리까지 권하며, 포도 몇 송이를 더 건네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기에 전부터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는 더 반갑고 고마워한다.


맛보라고 준 포도를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포도를 한 상자 사려고 한다는 말을 하자, 상자 위에 포도를 가득히 넣어준다. 그만 넣으라 해도 먹을만하다면서 더 얹어준다. 산 포도의 반 정도는 덤으로 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덤을 많이 주어도 되는 것인가를 의심할 정도의 푸짐한 시골 인심이다. 도시 근교에서 포도를 파는 젊은이가 이렇게 해도 남는 것이 있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젊은 사람이 싹싹하기도 하고 고마워 상자를 들고 일어서려 하자 젊은이가 얼른 일어선다. 자기가 굳이 차에 실어 준다는 것이다. 가볍기도 하고 포도를 손질하는 것에도 바쁜 사람이라 극구 사양했더니 기어이 자기가 들고 차가 있는 곳까지 들어다 실어 주고 간다.


포도를 사러 이 집으로 온 것은 오래 전의 추억이 있어서였다. 도시 근교지만 시골스런 정이 있고 푸근함이 있어서였다. 젊은이도 포도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포도밭 주인을 보고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그렇게 농사를 짓고 살아왔기에 그 아들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는 생각이다. 포도 한 상자가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어르신 그리고 아들은 포도를 파는 사람이 아닌 순수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맛보는 포도를 양껏 권하고, 한 상자 사는 손님에게 기꺼이 많은 양의 덤을 얹어주며 갖출 수 있는 호의를 가득 베풀어 준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젊은 부부를 만난 기분이었다.

꽃이 가득한 남아공의 와이너리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를 구입한 매장엘 가끔 찾아간다.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수리할 것이 있으면 찾아가는 곳이다. 보통은 주인이 나와 손님을 맞지만 종업원만 있는 경우도 있다. 종업원은 차량에서 자전거를 내려 안으고 끌고 와야만 자전거를 바라본다. 그리고 수리가 되었으면 수리가 다 되었다며 요금을 계산한다. 주인은 전혀 다르다. 차량이 오면 얼른 나와 자전거를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매장 안으로 들여놓고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자전거를 손본다. 이렇게 자전거 수리가 끝나면 자전거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각종 오물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동 세척기에 넣으면서 꼼꼼히도 청소를 해준다. 청소가 끝이 나면 반드시 차량 위에 또 실어 준단다. 정성껏 수리해 주고 청소까지 해 준 것이 고마워 내가 싣는다 해도 굳이 실어 준단다. 그렇게 차량 위 캐리어에 장착을 해주어야 그의 임무가 끝난 듯이 인사를 하고 매장으로 향한다. 너무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태연해함을 미안해하며 돌아오곤 한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여러 가지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포도 집 젊은이가 포도만을 팔아도 상관없고, 자전거 집 사장이 자전거를 수리만 해줘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사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늘 느끼며 살게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배려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오래도록 남아있는지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랜만에 찾은 포도 집 젊은 부부를 보면서,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오래전에 들렸던 자전거 집 사장을 생각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에도 또 그 상점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자전거 샵, 내년에 또 포도를 사러 가야만 할 것 같은 포도밭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모두가 그들이 삶의 철학이 담긴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행동이 자신들에게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를 대하는 누구에게는 쉽게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포도밭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포도밭이 개발되지 않고 남아있음이 너무 다행이다 싶다. 포도를 실고 돌아오는 중에도 포도가 향긋한 냄새를 차 안에 가득 안겨준다. 향긋한 포도 냄새와 사람의 냄새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고, 기분마저도 오래 기억되도록 포도향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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