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그리움(네팔의 포카가, 페와 호수)
3월의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4월이 올 즈음이 되면, 바람도 어느덧 따스함을 품고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이 즈음이 되면 도랑가 버들강아지는 벌써 하얀 솜털을 뽀송 거리며 얼굴을 내밀었고, 양지쪽으론 앙증스러운 찔레 순도 연초록 물이 들었다. 집 뒤의 작은 동산에도 봄기운이 서려 푸름이 서서히 찾아올 무렵, 산등성이의 진달래는 기지개를 켜고 하나둘씩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시골집을 기준으로 둥글게 자리한 작지 않은 뒷동산에는 하나둘씩 봄 식구들이 찾아와 자리 잡기 시작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쩡히 편한 길을 두고 먼 논둑길을 돌아 뒷동산을 거쳐 집으로 오는 길, 거기엔 언제나 연분홍 진달래가 있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보다 가랑잎 하나라도 모아 아궁이에 넣어야 했기에 산은 온통 벌거숭이로 변해버리곤 했다. 여기에 진달래도 예외 일 수는 없어 커다란 줄기는 오간데 없고, 간신이 목숨 부지한 가느댕댕한 가지에 연분홍 꽃을 이고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러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 꽃마저 꺾어야 했으니 어렵사리 꽃을 피운 진달래는 허망하기만 했다. 산등성 여기저기에 흩어 저 피어 다시 찾아온 봄바람에 봄을 즐기던 진달래꽃은 갑자기 온 날벼락에 처절한 봄이 되었지만, 여느 해처럼 그렇게 또 봄을 맞이해야만 했다.
허기진 발걸음 다시 내디뎌 산등성이에 올라 보면 저 멀리 푸른 산이 보이고, 아지랑이 아름다워 눈이 부실 무렵, 한 무더기의 연분홍 진달래꽃이 눈에 보인다. 운이 좋게 나무꾼 눈을 피해 온전히 꽃을 피웠으니 가지마다 풍성함이 모여 연분홍 꽃은 더욱 아름답다. 언젠가 나무꾼 낫에 잘린 그루터기 밑동에서 곧게는 싹이 나올 수 없어 굽어진 싹이 자라 나무가 되었나 보다.
한 겨울 눈보라를 이긴 덕에 한 무더기 진달래는 연분홍 꽃을 이고 봄을 즐기려 했지만, 허기진 배를 가진 아이들은 그 꽃마저 그냥 두지 않았다. 아이는 연분홍 진달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산등성이에 오르면, 커다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래 동네는 수많은 점으로 되어 있고, 멀리 흐르는 저수지 물줄기는 가느다란 실 줄기가 되어 있다. 그 줄기 옆으로는 봄이 흐르는 논을 따라 부지런한 농부들이 봄철을 서두르고 있고, 실 줄기가 생명줄이 되어 푸름을 키워 낸다. 이렇게 봄이 익어가면 초여름이 서둘러 오고, 농부는 묵은 논에 써레질을 하고 이웃과 함께 모내기를 한다.
아이가 이렇게 분홍빛 진달래와의 처절한 만남이 끝날 무렵, 뒷동산 골짜기에는 어린 찔레 순이 한 뼘쯤 자라났다. 엊그제 솜털을 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연초록 찔레순이 가느다란 줄기에 살을 두툼하게 찌웠다. 찔레나무 가지마다 나란히 찔레순이 자라 달착지근한 물이 배었으니, 아이는 날카로운 가시를 무릅쓰고 찔레순을 딴다.
찔레순에도 가시가 자라났으니 너무 쇠지 않은 순을 골라 꺾은 후, 찔레순에 달린 연한 가시를 잘라 내면 앙상한 줄기만 남게 된다. 아이는 기다란 찔레순이 연하면 그대로 먹기도 하고, 찔레순이 너무 자라 쇠었으면 껍질을 벗겨내고 잘근잘근 씹으니 약간의 달착지근한 물이 배어 나와 먹을 만하다. 먹을 만한 찔레순을 한 움큼 꺾어 먹으며 산등성이를 뛰어노는 사이, 봄은 어기적거리며 여름 문턱으로 다가선다.
여름이 서서히 익을 무렵, 산 중턱에 우뚝 서 있던 벚나무는 어느덧 하얀 꽃을 바람에 날려버리고, 앙증맞은 열매를 송이송이 매달았다. 연한 열매가 올망졸망 달려 가느다란 바람에도 그네를 타는 둥 마는 둥 한다.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을 견디고 나면, 그 열매도 거무스레한 빛으로 변하여 다디단 열매로 익어가리라. 이렇게 여름이 한 걸음 다가오면, 서럽게 분홍 꽃 내어 준 진달래는 어느덧 푸르른 잎으로 가득하다. 연초록빛으로 탄생한 잎은 바람과 이슬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검푸른 빛으로 물이 들었다.
초봄 머리 아이에게 할퀴어진 상처를 덮으려는 듯이 검푸른 잎은 풍성함을 갖추어 깊은 산으로 만들었고, 이웃 골짜기에 자리한 찔레나무도 아이의 어설픈 몸짓 없애려는 듯이 무럭무럭 자라나 아픈 상처를 덮어버렸다. 이제, 산등성이 벚나무는 푸르름에 검푸른 열매로 여름을 재촉하고, 줄기마다 하얀 꽃 치장한 찔레나무는 여름 속으로 젖어들었다.
검푸른 잎으로 치장 한 진달래는 초봄의 연분홍 진한 꽃을 잊은 듯하지만, 오래전 어린아이는 연분홍 진달래꽃과 쌉쌀하지만 달착지근한 찔레순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먼 산에 우뚝 솟은 벚나무를 바라보며 하얗게 매달린 꽃이 내년 봄에도 가득하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