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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전원 살이, 아름다운 계절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가을을 맞이하며, 삼잎국화)

by 바람마냥

느닷없이 가을을 시샘하는 추위, 갑자기 하얀 서리가 내렸다. 산간지방이라 그런지 푸르름이 졸지에 죽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푸르던 풀이 그렇고, 싱싱하던 녹음이 그렇게 되었다. 계절의 매몰찬 맛을 하루아침에 보고 말았다. 곳곳에 계절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고추밭에 푸르름이 사그라들었고, 길가의 메리골드가 축 늘여졌다. 싱싱하던 코스모스가 허리를 굽혀 떨고 있으며 감나무 잎이 변해 버렸다. 하얀 서리가 남겨 놓고 간 계절의 흔적들이다. 계절의 흔적들을 지우기로 했다. 처절한 계절의 야속함이 눈에 밟혀서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몇 포기되지 않는 고추밭으로 들어섰다.


여름이 들어서기 전, 푸름이 보고 싶어 심어 놓은 20여 포기의 고추다. 어마어마(?)한 고추모 중엔, 청양고추도 있고 아삭이 고추도 있으니 농사는 거창하게 시작한 셈이다. 어리숙한 농부는 부랴부랴 퇴비를 넣고 땅을 뒤집어 땅힘을 힘껏 돋워 주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추를 심어 놓자 고추모가 신이 났다. 순식간에 키를 불려 놓았다. 작은 바람에도 넘실거리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 감당할 수도 없는 키를 불려 놓아 작은 바람에도 제 몸을 추단 하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주인의 은덕을 입어 몸을 지탱하고 여름을 지냈다. 철부지 고추는 너그러운 주인장의 은혜에 보답하기 시작했다.

IMG_9377[1].JPG 여름이 깊숙하게 익어가고 있다.

어느새 하얀 꽃이 피더니 동네 벌을 다 끌어 모았다. 하얀 꽃이 고추 모양으로 어느새 몸집을 불렸고, 거기에 매운맛까지 단단히 장착하였다. 매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새끼손가락만 한 청양고추, 된장에 찍어 입에 넣고 씹자마자 진저리가 처질 정도로 맵다. 아, 이게 청양고추로구나! 감탄을 한다. 매운맛도 종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고추의 매운맛이 다르고, 후추의 매운맛이 다르다. 청양고추의 매운맛은 상큼한 매운맛이다. 짜증 나지 않는 상큼한 매운맛이 입안을 감싼다. 매운맛이 서서히 없어지며 개운함을 주는 맛이다. 매운맛이 그리워 또 고추로 손이 가고 마는 매운맛이다. 이런 재미로 청양고추를 심고 따 먹는다. 아삭이 고추, 나름대로의 멋진 맛이 있다.


청양고추보다는 큼직한 아삭이는 그야말로 아삭한 맛을 준다. 큼직한 놈을 골라 된장을 찍는다. 입안에 넣고 씹자마자 아삭한 맛이 경쾌하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안에 퍼지는 맛, 달큼하면서도 시원한 맛에 환장할 맛이다. 청양고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름의 맛이 있다. 역시 고추에 따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맛이다. 청양고추와 아삭이고추는 근처 이웃이다. 이웃은 언제나 친근하고 가까운가 보다. 갑자기 아삭이 고추가 매운맛을 장착했다. 어쩐 일인가 하는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이웃에 사는 청양고추가 매운맛을 나눠 주었고, 이웃에 사는 아삭이가 냉큼 받아먹고 만 것이다. 상큼함에 매운맛까지 갖춘 아삭이고추로 변신하게 된 이웃집 사이의 은밀한 사건이다.


삼겹살이 그리운 사람들이 가끔 찾아온다. 친구들도 오고 가까운 친지들도 찾아온다. 시골에선 삼겹살 구이가 최고 아니던가? 시골의 삼겹살이 그리운 사람들이다. 자리를 펴고 삼겹살을 굽는 동안 고추 밭으로 간다. 청양고추와 아삭이 고추를 냉큼 따서 상위에 놓는다. 시장에서 사 온 고추와는 품위가 다르다.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 삼겹살 상에 참여시켰다. 상추 두어 장에 쑥갓을 한 잎, 그 위에 삼겹살이 놓인다. 다시 잘게 썬 청양고추 두어 개 그리고 마늘과 된장을 곁들여 입안으로 투하시켰다. 삼겹살의 고소함에 상추와 쑥갓의 쌉쌀함 그리고 마늘과 청양고추가 어우러지는 맛, 환장할 맛을 준다. 노릇노릇한 삼겹살의 고소함에 청양고추의 매콤함이 입안을 휘저어 놓았다. 도저히 포가 할 수 없는 맛, 어찌 이 맛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IMG_E9266[1].JPG 베고니아가 가을을 부르고

갑자기 산을 넘은 추위가 서리를 쏟아 놓았다. 여름내 입맛을 돋워주던 거대한(?) 고추밭이 쑥대밭이 되었다. 축 늘어진 고춧대엔 아직도 큼직한 고추가 달려있다. 고춧잎은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아직, 쓸만한 풋고추들이다. 계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추밭으로 들어선 것이다. 여름내 입맛을 얼얼하게 만든 고추, 서리를 맞았어도 버릴 수가 없다. 은덕을 입은 주인장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고추 아니던가? 푸름을 과시하며 푸르른 청춘을 불살랐던 고추였다. 정성스레 남은 고추를 따서 냉장고에 모셔 놓았다. 끝까지 주인을 위해 열려있던 고추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이다. 아깝기도 하고 지극정성으로 열매를 맺었던 고추가 기특해서이다. 언젠가는 제값을 톡톡히 할 것이리라.


계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푸름과 맛을 주던 고춧대를 뽑아야 한다. 지극정성으로 대하던 텃밭의 고추와 이별을 해야 한다. 지주대에 묶어 놓은 끊을 끊어 내고, 고추를 지켜주던 지지대를 뽑아냈다. 여름부터 고추를 지켜주었으니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고춧대를 뽑아야 했다. 손가락만 하던 고추모가 여름 비와 주인장의 보살핌으로 제법 몸집을 불렸다. 가느다라던 어린 고추모가 굵직한 어른이 된 것이다. 주인을 위해 다시 손님으로 온 인간들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아직도 남은 청춘을 살아야 했지만 산을 넘은 냉기가 모멸 차게 서리를 쏟아 놓았다. 순식간에 서리를 만난 고추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IMG_9391[1].JPG 가을은 더 영글어 가고 있다.

계절의 변화 속에 속절없이 명을 마감한 고추, 막상 뽑아내려니 서글퍼진다. 어린 고추모가 주인의 도움으로 작은 밭에 터를 잡았다. 몸살을 앓던 작은 고추는 어느새 힘을 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히 몸을 불려 세찬 비바람을 견디어 냈다. 청춘의 푸르름에 알찬 열매를 달고 짓궂은 여름 비에도 끄떡없었다. 모진 비바람과 얄궂은 병해도 이겨냈고 열매를 맺었다. 가끔은 붉게 치장하며 세상을 노래했다. 갖가지 맛으로 입맛을 돋워주던 고추였다. 언제까지 살 것만 같았던 푸르름을 갖춘 고추가 계절 앞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산을 넘은 한 줌의 서리를 받으며 고귀한 명을 다했다. 자연의 섭리 속에 살아 있는 생명들, 자연을 어길 수는 없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황금빛 들녘을 한동안 기대했지만 순식간에 추위가 찾아왔다. 산을 넘은 냉기에 온갖 푸름이 맥을 끊고 말았다. 풋풋한 푸름은 힘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다. 삶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어 풋풋한 청춘도 늙음을 준비해야 한다. 준비 없이는 순식간에 서리를 만날 수 있다. 산을 넘는 서리가 언젠가 오리라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알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젊음이 남아 있을 줄 알았다. 푸름 속에 살만했던 시절, 언제까지나 그 순간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착각이었다. 준비도 할 겨를 없이 찾아온 추위, 푸르름을 순간에 삼켜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자연 앞에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아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엄숙한 자연의 이치였다. 누구나 순응해야 하는 자연 앞에선 작은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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