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조화, 가을 풍경)
가을 들어 아침 공기는 서늘하기만 했다. 언제나 갖고 싶고, 마시고 싶은 맛이다. 어느 날, 서늘함이 싸늘함이 된 공기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을이라 서서히 단풍 드는 계절, 하루아침에 당혹스러워졌다. 갑자기 내린 하얀 서리 때문이었다. 고추밭이 그렇고, 배추밭이 그랬으며 뒤뜰의 드렁칡이 그랬다. 순식간에 푸름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서히 찾아오는 서늘함에 너도 나도 준비를 하고, 가을색에 맞는 옷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찬 서리는 많은 것을 당황하게 했다. 가을이면 당연히 울긋불긋한 단풍이 서서히 찾아오곤 했다.
앞산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오는 단풍이었다. 산이 가득한 꼭대기에서 서서히 물이 들기 시작한다. 큰 나무가 물들이고 남은 물을 아래로 넘겨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 스스로 분장을 해 온 가을이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붉음도 좋고, 노랑도 좋았다. 하지만 그 어울림은 나무랄 데 없는 조화가 있다. 적당한 붉음이 있는가 하면 연한 노랑이 있었다. 붉음과 노랑이 동행하면 조화롭게 양보하여 색을 맞추곤 했다. 그렇고도 남은 물결은 작은 도랑을 따라 흘러갔다. 졸졸거리고 흐르는 도랑물이 널따란 들녘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널따란 들녘도 저마다의 색깔을 정한다. 누렇게 색을 칠한 벼가 있는가 하면, 검붉음으로 물들이는 수수도 있다. 비탈밭에는 푸름을 좋아하는 배추가 있는가 하면, 푸름과 붉음을 적당히 좋아하는 고추밭도 있다. 누렇게 빛을 발하는 논둑에는 푸름과 주황이 섞인 두렁 콩이 있다. 넓은 누렁에 적당한 주황이 간을 맞추며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갑자기 찾아온 하얀 서리가 색깔의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우선은 가까이 뒤뜰 감나무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적당한 따스함과 서늘함이 섞여 있는 가을이 왔다. 어느새 몸집을 불린 감이 달린 감나무는 긴장해야만 했다. 언제 서늘함이 찾아올지 몰라서였다. 따스함과 서늘함이 적당히 섞인 가을, 감나무는 초록에 서서히 붉음을 물들인다. 간간히 붉음은 점으로 되었고, 점이 넘치면 널따란 면이 되어갔다. 푸름에 섞인 붉음은 노랑이 간섭을 했다. 중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푸른 바탕에 노랑과 붉음이 어우러진 감나무 잎이었다. 지나는 바람 타고 떨어진 감나무 잎, 찾아온 햇살에 반짝이며 온몸을 과시했었다. 가을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녔기 때문이다.
하얀 찬서리가 내린 시골집, 감나무가 당황했다. 감나무 잎은 졸지에 주눅이 들었고, 기세 등등하던 드렁칡도 손을 들고 말았다. 산을 넘은 찬 서리가 순식간에 기를 꺾어 놓은 것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푸름 속 식구들이 가을 색을 잃어버렸다. 푸름과 붉음의 중간색을 칠할 사이도 없는 가을이었다. 정신 차린 감나무, 당황한 잎은 어쩔 수 없었으니 묵직한 붉은 감과 함께 가을을 보내야 했다. 하얀 서리에도 끄떡없는 식구들이 있었다. 어느새 붉게 치장한 화살나무가 있었고, 자그마한 도랑이었다.
여름내 북적이던 집 앞 도랑은 부자가 되었다. 곳곳에서 찾아온 식구들 때문이다. 날렵한 낙엽송이 주황빛 잎을 쏟아 보냈다. 찬 서리에 깜짝 놀란 낙엽송이다. 고요하던 낙엽송에 산바람이 찾아왔다. 바람결을 이기지 못한 낙엽송은 잎을 떨구어야 했다. 꽃비 되어 떨어진 낙엽송 잎, 소나무도 어쩔 수 없다. 푸르름을 가득 안고 있던 소나무도 놀란 기색이다. 찬서리가 찾아오던 날, 푸름 위에 하양이 더해졌다. 가을이 서서히 깊어진다는 신호였다. 노랗게 물든 소나무 잎이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도랑 가득히 내려와 앉았다. 촐랑대는 도랑물에 온갖 식구들이 모인 것이다. 빨간 화살나무 잎이 주연인 듯, 소나무와 낙엽송이 참견을 한 것이다.
이래저래 부자가 된 도랑물은 이내 조용해졌다. 가을 따라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삶을 생각하고 살아온 한 해를 되돌아보려나 보다. 콸콸대던 목청은 온데간데없고 밤새도록 소곤댐이 가을을 닮았다. 종알종알 종알거림이 사색의 소리였고, 계절을 기억하는 가을 소리였다. 살이 찌어 가득하던 앞산도 헐렁해졌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던 몸집이었다. 한 줌의 햇살도 비켜갈 수 없는 앞산, 헐렁한 몸집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어느새 찾아온 햇살이 무사히 산을 건넜다. 어느새 뒷산으로 꽂힌 햇살이 골짜기를 갈라놓았다. 시골 식구들이 훤히 보이는 아침이 온 것이다.
순식간에 찾아온 가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찬서리에 혼미해진 식구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알아 채린 식구들도 있다. 나름대로의 준비로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계절의 순환을 어길 수 없는 삶, 주어진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넘치는 붉음도 없고, 지나친 노랑도 없는 계절이다. 넘침에는 참견해 주는 간섭이 있고, 간섭에는 받아주는 넘침이 있다. 자연이 조화롭고도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노랑과 붉음이 적당하도록 섞임의 조화도 있었다. 섣부른 찬바람도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을이 선뜻 찾아온 시골구석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진리이기도 했다. 짙어가는 가을 색에 마음까지 물든 시골 아침 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