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날, 뜰에 핀 구절초)
눈을 떠 보니 새벽 3시, 깜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시커먼 앞산에 내리는 비에 놀라 나뭇잎이 떠드는 소리였다. 여름 장맛비를 방불케 하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덩달아 찾아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빗방울을 흩날린다. 나뭇잎이 떠드는 소리에 바람까지 합세했다. 골짜기 삶은 항상 걱정이 찾아온다. 비가 와도 걱정이고, 눈이 와도 걱정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도랑물이 아우성이다. 여름 장마철에 만나는 소리가 또 찾아온 것이다. 가을장마라니! 자연이 주는 풍요한 만큼, 걱정거리도 안겨주는 골짜기의 삶이다. 언제나 풍성함만이 있는 전원이 아님을 다시 한번 알게 한다. 또, 비가 내리고 있다.
골짜기엔 자연이 주는 갖가지 선물이 있지만 감수해야 하는 것도 많다. 뒤돌아서면 자라나는 잡초가 있는가 하면, 언제나 신경 써야 하는 습기와의 전쟁도 있다. 여름내 긴 장마가 있었는데 아직도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녹음이 있으니 습기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다. 물이 없으면 갖가지 채소와 잔디밭이 걱정이지만, 너무 많으면 또 걱정이다. 집안이 습하면 곰팡이를 비롯한 각종 벌레가 서식하기 좋기 때문이다. 골짜기가 퍼 주는 감사함도 많지만 걱정거리도 많은 새벽이다. 후드득 거리던 비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나뭇잎은 떠들고 있다. 조금만 줄어들면 듣기 좋은 소리일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오래 전의 기억이다.
다소곳이 내리는 비는 참 좋았다. 작은 마루에 앉아 앞산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오후, 옆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징하게 고단했던 농사일, 어머니를 잠시 쉬게 해주는 비가 고맙기도 했다. 아버지는 뒤 작은 툇마루에서 코를 고신다. 고단함을 표현할 길이 없어 한숨의 낮잠으로 대신하신다. 고요한 시골집의 풍경이다. 가끔 뒤뜰 감나무 잎에 머물던 빗방울이 툭하고 떨어진다. 떨어지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며 빗줄기가 약해짐을 알려준다. 먼 앞산에선 뿌연 안개가 산허리를 감았다. 사선으로 떨어지던 빗방울도 작은 방울로 변했다. 언제나 이런 비가 왔으면 하는 여름날의 비였다. 아쉬운 여름 비가 점점 줄어들더니 밝은 햇살이 솟아났다.
몸을 일으킨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는 들로 나서야 했다. 하얀 수건을 질끈 묶은 어머니는 텃밭으로, 아버지는 들녘으로 서두르신다. 컴컴한 밤이 되어야 고단함을 멈출 수 있다. 조용하던 시골집이 부산 해지는 오후, 잠시의 빗줄기가 모든 것을 멈추게 했지만 밝은 햇살은 그냥 두지 않았다. 서둘러 새끼를 몰고 암탉이 수선을 떤다. 곳곳을 헤집으며 먹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잠시도 발을 그냥 두지 않는다. 곳곳을 헤집고 두리번거리면서 새끼를 불러 세운다. 들로 나선 어머니와 어미닭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둘러 햇살이 찾아온 시골집은 다시 고요함으로 젖어들었다. 잠시 작은 비가 찾아온 시골집에 평화가 스며든 것이다.
점차 앞산의 부산함도 줄어들었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머뭇거리기 때문이다. 허락도 없는 바람이 창문을 훅 넘었다. 시원함보단 서늘함이 많은 바람이다. 시원함에 팔뚝을 들이밀던 바람이 아닌, 옷깃을 여미게 하는 산바람이다. 여기에 느닷없이 새벽닭 소리가 끼어든다. 붉은빛 깃털을 가진 수탉이리라. 어떻게 알았는지 뿌옇게 밝아오는 빛을 알아 채린 것이다. 붉은빛이 있는 이웃집 수탉, 두 다리를 곧게 세우고 목을 길게 늘여 어둠 속 허공을 향하는 소리다. 목엔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깃털이 곧게 서 있으리라. 수탉의 수선에 암탉은 침묵으로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탉 소리가 동네를 흔드는 아침, 여전히 도랑물 소리는 두런거리며 골짜기를 깨워 준다. 가끔 처마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있다.
일정한 듯 일정하지 않은 빗방울 소리다. 빗방울 소리는 방울방울 소리가 다르다. 떨어지는 간격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강약도 다르다. 리듬이 있는 듯도 하지만 없는 듯도 해 귀를 더 기울인다. 창문으로 몸을 숙여 귀를 들이민다. 일정한 크기와 간격이었다면 지루했을 소리가 알았다는 듯이 리듬을 준다. '툭'하고 떨어진 물방울 소리가, 난데없이 '투우 욱'하고 떨어진다. 한참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소리다. 서서히 물방울 소리가 잦아들면서 비가 멈추어감을 알려준다. 서서히 검푸른 앞산이 드러나면서 구름이 머문 하늘이 보인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나긴 어려운가 보다. 작은 비가 내린 골짜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가 왔으니 오늘은 텃밭 식구들도 한결 싱그러우리라.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아니어서다.
가을비가 걱정스럽지만, 고맙기도 한 것은 텃밭 가족 때문이다.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는 텃밭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물을 줘야 한다. 길게 호스를 연결해 뿌려주는 수돗물, 하늘에서 뿌려주는 물과는 전혀 다르다. 아무리 많은 물을 줘도 빗물이 내린 텃밭의 모습은 다르다. 수시로 물을 주는 화분도 시큰둥하다. 텃밭의 채소는 본척만척한다. 물이 흠뻑 젖어든 듯 하지만 순식간에 물기 없는 굳은 땅이 되고 만다. 자연의 신기함을 또 한 번 실감한다. 빗물에 젖은 채소는 모습이 다르고 흙의 젖음도 다르다. 촉촉함이 다르고 살갗에 스치는 흙의 감촉이 다르다. 언제나 자연은 이겨 낼 수 없음을 실감한다.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난 앞산의 녹음이 가을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우두커니 서 있는 녹음의 정적이 가을이고, 하늘 속 새들도 가을이다.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이 조용하고,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머물던 녹음이 숙연해졌고, 녹음 위를 지나는 공기도 고요하다. 앞산에 꺽다리 잣나무도 말을 잃었다. 고요함 속에 젖어든 잣나무가 숙연하다. 옹골찬 잣이 가득한 열매를 곳곳에 떨구어 지나는 다람쥐를 바쁘게 하던 잣나무다. 오늘따라 눈만 껌벅이며 구름이 머문 하늘을 본다. 깊은 고뇌에 젖은 듯한 잣나무다. 무엇을 그리 깊게 생각하고 있을까? 고요한 골짜기 동네를 지키던 잣나무, 하늘 속에 몸을 드리우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서서히 단풍이 내려오는 골짜기에 정적 속에 젖어 있다. 골짜기에 모여사는 산 식구들이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기는 가을 속 골짜기의 고요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