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마음으로 가을 잔치를 마무리했다.

(김장하는 날, 골짜기의 풍경)

by 바람마냥

어김없이 지난해의 가을이 왔다. 가을이 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온 가족을 불러 김장을 하는 행사다. 가족이라 해야 딸과 아들밖에 없지만, 모두 불러 모아 가을날의 한판 놀이를 하는 것이다. 고기를 굽고 김치를 담그는 하루의 놀이,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가을날의 잔치다. 멀리 부산에서 딸과 사위가 오고, 수원에 사는 아들 내외가 온다. 모든 준비는 아내와 함께 하고, 아이들은 시골집을 찾아 김치를 담그며 떠들고 먹어주면 되는 일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 아내와 걱정을 했다. 구질구질하게 비라도 내리면 잔칫날이 불편해서다. 늦은 밤에 미리 딸 내외가 왔다. 부쩍 자란 손녀는 시골집에 오길 좋아한다. 떠들 수 있고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작은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고, 물을 주며 뛰어노는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늦여름부터 텃밭을 차지하고 있던 배추를 뽑고, 여름을 이겨낸 고추를 빻아 가루를 만들었다. 텃밭 가장자리에 자란 골파와 갓을 곁들인 양념을 함께한 김장, 김치를 하는 것이다. 뒤 울에 걸렸던 마늘을 까고, 깍두기를 써는 밤이다. 동치미까지 하기 위한 무를 씻어 놓는 어머니는 늘 바쁘셨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가을날의 큰 잔치를 벌이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부지런이 텃밭을 오고 가셨다. 풀을 뽑고 물을 줘야 했으며 가끔 벌레도 잡아주어야 했다. 정성을 다해 돌보아 기른 배추가 어느새 텃밭을 가득 채웠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텃밭의 광경이다. 드디어 가을이 저물어 갈 무렵에 날을 잡았다.

그리움 속의 감이다.

농사일을 마무리한 아버지 등짐으로 배추를 뽑아 들였다. 실하게 몸집을 불려 노란 고갱이가 가득한 배추다. 배추를 다듬고 우물에 씻어 반으로 갈랐다. 일 년 동안 간수를 뺀 맛깔난 소금에 절여냈다. 새벽부터 씻어낸 배추는 커다란 다라에 옮겨졌고 저녁내 만든 양념과 어우러졌다. 붉게 물들어가는 김장김치, 돼지고기를 삶아 겉절이와 한쌈 먹는 기분은 가을날의 최고의 특식이었다. 서서히 김장이 마무리되면 뒤뜰에 구덩이를 파고 김칫독을 묻는 아버지, 한 겨울을 지나칠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잔치 겸, 겨울준비의 끝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삶의 방식도 바뀌었다. 김치가 없어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 굳이 이 난관을 맞이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다행히 아이들이 잘 따라주어 이 고단한(?)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오래 전의 추억을 되돌리고 싶은 늙어가는 청춘의 고집이었다. 시골에 둥지를 틀고 시작한 가을날의 잔치가 몇 해째 계속되고 있다. 올해도 아이들을 불러 모아 김장을 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몇 해 전부터 시작한 가을 의식은 세월과 함께한 한풀이도 되었고 신나는 굿판이 된다. 스스럼없이 오는 아이들이 있고, 준비를 하는 아내가 있어 해마다 기다리는 추억이다. 올해도 그냥 지날 수 없는 김장하는 날, 기어이 11월 한 날을 잡았다. 혹시,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기상예보가 빗나가길 기대하는 날이었다. 눈을 뜬 새벽, 하루도 건널 수 없는 운동을 하기 위해 나섰다. 앞산에 뿌연 안개가 가득하다. 비가 온다 했는데 안개가 끼다니, 기대해 볼 만한 날씨다.

맑은 햇살이 찾아왔다.

새벽 운동을 하면서 바라본 앞산이 밝아진다. 산 말랭이가 밝아지더니 반가운 햇살이 넘어왔다. 비가 오지 않을 모양이다. 서둘러 운동을 끝내고 마트엘 들렀다. 가을 의식에 필수품인 돼지고기와 맛깔난 굴을 사기 위함이다. 벌써부터 김장철을 준비하는 시장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와, 이런 분위기에 젖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언제나 아내가 해 온 일을 대신하는 올해다. 푸짐하게 돼지고기와 굴을 사들고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벌써 김장준비를 서두른다. 절임배추와 각종 양념을 준비하는 일이다. 딸과 며느리는 밑 양념을 준비하고, 아들과 사위는 파와 무를 썰며 고기를 준비했다. 손녀는 이것저것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작은 손으로 무를 썰며 신나는 몸짓이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나고 이젠, 오늘의 의식 중 가장 중요한 보쌈을 먹는 일이다.


고기를 삶은 아들, 가지런히 고기를 썰어 준비했다. 밝은 햇살이 비추는 골짜기에 식구들이 다 모였다. 고기를 햇배추에 싸서 먹는 즐거움, 어디서 이런 맛을 볼 수 있을까? 앞산에 밝은 햇살이 내렸다. 햇살 따라 황금비가 쏟아지고 있다. 가을 따라 물든 낙엽송 잎이 바람결에 날아든다. 야, 이런 그림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맑은 햇살 따라 비추는 황금빛 낙엽송이 빛을 발한다. 군데군데 가을빛을 거드는 소나무에 황금빛이 서려있다. 언제나 푸를 것 같은 소나무에도 황금빛 잎이 자리 잡았다. 여기에 가을 따라 물든 낙엽송 잎이 빛을 발하니 앞산은 온통 황금물결이다. 여기에 온 가족이 다 모여있다. 골짜기의 삶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맛을 볼 수 있을까? 낯 술 한잔에 얼큰해진 영혼은 세상을 다 가졌다. 부러울 것이 없는 가을날의 잔치다.

그리움을 찾아가는 길, 낙엽이 가득하다.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김장을 서두른다. 둥글게 모여 앉아 김치를 담그는 일이다. 손녀는 신이 났다. 커다란 장감을 끼고 배추와 양념을 버무리는 솜씨가 제법이다. 아들과 사위가 앉아 김장을 하고, 딸과 며느리가 마무리를 한다. 아내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총감독이다. 이것저것을 정리하며 준비해주는 손길이 바쁘기만 하다. 서둘러하는 김장이 마무리되었다. 두어 시간의 노동으로 일 년의 반찬이 마무리되었다. 모두는 피곤한 듯도 하지만 같이 어울리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다.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는가? 따지고 보면 돈으로 조금씩 사다 먹는 것이 경제적일 수도 있다. 변하는 세월 속에 가끔은 망설여지는 김장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같이 모여 놀고 즐기는 사이가 가족이 아니던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바비큐 행사가 남아 있고, 사위가 준비한 거대한 랍스터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홍어와 아들이 준비해온 맛깔난 술이 남아 있다. 이젠 서서히 소화를 시켜야 한다. 가을날의 잔치를 위한 몸짓으로 고단한 하루다. 모두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골짜기에서 하루를 보낸다. 쉬기도 하고 영화도 보며, 오랜만에 가족의 의미를 찾아본다. 가장으로서의 아쉬움, 정스러운 삶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언제나 집을 생각하고 수시로 찾아오는 집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와야 하는 날에 찾아오는 집은 본래의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고 싶어 오고, 쉬고 싶어 오는 집이 집이라는 생각이다.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집은 될 수 없을까? 텃밭으로 엄마를 찾아가고, 논두렁으로 아버지를 도우러 가는 집은 만들 수 없을까? 늘 아쉬운 일이지만 안타까움으로만 남아 있는 가족의 의미다.


한참의 휴식과 함께 벌어지는 가을 잔치가 끝이 났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이며 시작한 축제의 끝은 화려했다. 사위가 준비한 랍스터가 붉음의 미를 자랑했고, 두툼한 돼지고기는 맛깔난 맛을 선사했다. 날씨마저 따사한 바람을 선사함에 감사한 골짜기다. 아들 내외가 프랑스 여행에서 준비해온 코냑이 곁들여졌으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사방이 어두운 골짜기 속이다. 아무런 방해도 없는 한적한 밤이다. 사방이 고요한 골짜기에서 랍스터와 바비큐가 어우러진다. 여기에 향긋한 코냑이 어우러져 한껏 흥을 돋우는 잔치상이다. 함께한 가을날의 잔치가 서서히 끝이 났다. 아름다움을 함께한 가을날의 잔치, 아이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소중한 하루다. 얼마나 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감사한 마음으로 가을날의 잔치를 마무리하는 골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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