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계절, 서리 내린 아침)
아침 창문을 열자 하얀 서리가 내렸다. 야트막한 앞산에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이다. 늦가을로 접어들어 이젠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굵직하던 도랑물 소리도 어느덧 잦아들어 간신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골짜기다. 봄부터 가을까지 처마 밑에서 조잘대던 참새들도 흔적을 감추었다. 어디에서 이 추위를 견디고 있을까? 오늘따라 이웃집 닭들도 조용하다. 웬일일까? 느닷없이 찾아오는 찬 바람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앞산에 나무들도 흔들림이 멎었고, 산 식구들도 입을 멈추고 말았다. 언제나 고요함 속에 시끌벅적하던 골짜기에 겨울이 안겨준 고요함이다.
뜰 앞의 잔디밭에 나뒹구는 낙엽들, 뒷산에서 찾아온 식구들이다. 가느다란 낙엽송 잎부터 커다란 참나무 잎까지 다양하다. 느지감치 가을을 보낸 공작 단풍, 계절을 보내며 삶을 다했지만 붉음은 아직이다. 온갖 가을 식구들이 어울려 잔디밭을 서성인다. 산을 넘은 작은 바람이 찾아왔다. 노랗게 물든 낙엽송 잎은 대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소나무 잎도 어림도 없다는 자세지만, 넓은 치맛자락을 펼친 참나무 잎은 한결 여유롭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잔디밭을 거닐고 있다. 거기에 작은 공작 단풍잎도 자연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대로 몸을 맡이고 있는 초겨울 풍경이다.
도대체 이웃집 닭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새벽부터 소란을 떨던 녀석들이 입을 다물었다. 추위가 찾아오자 추위를 막으려고 가림막을 해준 탓인가 보다. 아직도 어두운 닭장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가 보다. 작은 빛도 감지하고 울던 닭들이 꼼짝도 하지 않음은 겨울이 왔다는 징조다. 여기에 한참 살이 쩠던 도랑물도 몸집이 홀쭉해졌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 소리로 골짜기를 호령하던 도랑이었다. 어느새 몸집은 가느다란 선이 되고 말았다. 간신이 명맥을 유지하는 도랑물, 곳곳에서 흐름이 막혔다. 떨어진 낙엽에 발목이 잡히고, 작은 돌멩이에 손이 묶였다. 이내, 작은 소리로 겨울을 알리고 있는 가느다란 도랑물이다.
뜰앞 잔디밭에도 초겨울이 찾아왔다. 누런 빛으로 물든 잔디에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이다. 햇살이 산을 넘어야 하얀 서리발을 벗어 내리라. 산수유 붉은 열매에도 서리가 내려 바르르 떨고 있다. 산 넘은 햇살 덕에 하얀 서리발이 놓아주자 기어이 빨간 모습으로 웃고 있다. 간신히 살아났다는 안도감인지 오늘따라 빛나는 붉음이 안쓰럽다. 늘 푸르던 소나무도 죽은 듯이 멈추었다. 푸르기만 하던 잎에 누런빛이 더해졌고, 햇살이 찾아오길 고대하고 있는 눈치다. 모든 것이 멈춘듯한 골짜기, 가끔 동네 지킴이가 맥칼 없이 짖는 소리가 오고 간다. 골짜기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다. 견디기 힘겨울 정도의 바람이 찾아온다.
잔디밭에 수도는 겨울 옷으로 갈아입혔고, 추위에 약한 감나무도 옷을 입혔다. 언제나 붉은 홍시를 기대하는 감나무를 포기할 수 없어서다. 지난해엔 몇 개의 감을 까치에게 선물했지만, 올해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쉬움에 50여 개의 감을 구해 곶감을 만들었다. 골짜기에 붉음이 주는 정취를 느끼고 싶어서다. 보기 좋게 매달았지만 산까치가 그냥 두질 않는다. 오고 가던 산까치에 들켜 이내 양파망을 써야 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같이 먹고살자는 산까치를 떨쳐낼 수 없는 산골짜기다. 언제나 곳곳을 누비고 있는 산까치, 더불어 살기 불편한 산 식구 중에 하나다. 널따란 들판에도 초겨울이 찾아왔었다.
논에도 비탈밭에도 썰렁함이 가득하다. 벼를 베고 난 그루터기는 하얀 서리발이 곧추서 있고, 긴 논두렁도 하얗게 변했다. 가끔 불어오는 산바람에 미루나무는 노란 잎을 떨구고 말았다. 옹골찬 산바람이 누런 잎을 구석으로 몰아놓았고, 휑한 논 자락엔 바람만이 썰렁했다. 추억과 그리움을 주던 그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골짜기에 자리한 지붕에선 연기가 피어나고, 놀러 나간 아이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아이는 아쉬움 속 뒷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가느다란 돈두렁을 건너 집으로 향하는 길, 썰렁한 골목에도 겨울이 지키고 있었다. 서둘러 뛰어야 하는 이유였다.
부엌에선 어머니 발걸음이 분주했다. 뿌연 연기 속에 얼른 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기다리고 있는 초겨울의 저녁, 밥을 해야 하고 된장을 끓여야 했다. 뒤 울에 묻어 놓은 김치를 꺼내야 하고, 김칫국이라도 끓여야 했다. 아궁이에 남은 잔불에 된장 뚝배기를 올려놓았다. 된장 냄새가 진동하는 어둑한 부엌, 그 속엔 언제나 어머니가 계셨다. 서둘러 화롯불에 불을 담아내고, 밥상을 들고 들어서는 어머니였다. 화로에는 어김없이 된장 뚝배기가 끓고 있다. 먼지 앉은 수건을 쓴 어머닌, 쟁반에서 구부리고 저녁을 먹어야 했다. 고단한 초겨울의 하루를 마감하는 어머니의 일과였다. 그리움 속 추억이 되어 버린 오래 전의 기억,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초겨울이다.
골짜기에 초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이 성큼 다가 온 골짜기, 모든 것이 정지된 모습이다. 꽁꽁 얼어 잠들어 있는 골짜기는 하늘마저 숨이 멎었다. 기어이 수탉의 울음소리가 찾아오고, 이웃의 굴뚝에 하얀 연기가 솟아난다.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는 골짜기, 가끔 오가는 유조차가 겨울임을 실감하게 한다. 굴뚝에 하얀 연기가 피어나는 아침이면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푸근하게 눈 내리는 모습이 그리워서다. 아직도 동심의 한 조각은 남아 있나 보다. 하늘 높이 춤을 추며 내리는 눈, 언제나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쓸어내야 하는 눈이 힘겹지만, 눈 내리는 앞산은 또 다른 추억이다. 하얀 서리가 덮고 있는 골짜기에 한없이 조용함이 찾아온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