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겨울 풍경, 골짜기의 보금자리)
겨울이 찾아온 골짜기 저녁나절, 햇살이 서산으로 기울었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산 말랭이엔 붉은 햇살이 남아 있고, 남은 햇살은 주황빛 낙엽송을 환하게 밝혀준다. 겨울이 찾아왔지만 골짜기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루를 장식하던 햇살이 남긴 산 그림에 눈이 멎었다. 아기자기한 골짜기 산이 보여주는 초겨울 풍경이다. 곳곳의 굴뚝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산 쪽에 남아 있는 햇살과도 잘 어울린다. 한참을 서성이다 눈이 머문 잔디밭, 잔디를 가꾸려 잡초를 뽑아내던 골짜기의 놀이터다. 한해를 장대하게 살아내고 누렇게 누워 쉬고 있는 잔디다. 골짜기를 화려하게 꾸며준 많은 식구들, 같이함에 너무 행복했다. 우선은 작은 텃밭 식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햇살이 있었고, 맑은 바람과 이슬이 있었다
산을 넘어오는 맑은 햇살은 골짜기를 살려내는 주인이다. 향긋한 바람이 계절을 몰고 오면, 가끔은 안개가 찾아오고 맑은 이슬도 찾아왔다. 아침마다 맑은 이슬은 계절 따라 서리가 되고 하얀 눈이 되기도 했다. 생명을 길러내는 빛과 바람 그리고 빗물이 길러내는 골짜기엔, 제일 먼저 이웃집 닭이 새벽을 연다. 수탉이 길게 목을 늘이면 암탉이 부스럭거리고, 동네 지킴이도 일어나야 했다. 처마 밑에 신혼집을 차린 참새가 난리를 피운다. 창문을 열고 손사래를 쳐도 본 척도 않는다. 가끔 하늘을 가르는 여름 뻐꾸기가 날면, 산까치도 여기에 합세한다. 먼 산 소쩍새는 가끔 그리움도 전해주고, 하늘에서 날짐승들이 함께 살아간다. 봄철 개구리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며 여름이 깊어갔다. 길냥이들이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짝을 찾는 고라니가 울부짖는다. 맑은 햇살과 바람이 길러낸 텃밭도 있다.
예닐곱 평에 불과한 텃밭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자연의 신비함을 보여주었고, 노동의 대가를 알게 했다. 봄부터 만난 상추가 있었고, 쑥갓이 있었으며 여기에 케일과 아욱이 있었다. 전원에서 빼놓을 수없는 삼겹살에 동참했던 상추와 쑥갓은 일등공신이었다. 봄 상추부터 여름에서 가을상추까지 잊을 수 없는 가족이었다. 가을상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한 텃밭엔 고추와 가지 그리고 토마토를 생산해 주었다. 붉음과 푸름으로 장식하던 고추와 토마토는 텃밭의 일등 품목이다. 붉은 열매에 내린 맑은 이슬, 이슬 위에 앉은 맑은 햇살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계절의 축복이다.
보랏빛 꽃과 열매를 보여주었던 가지는 올해가 대풍이었다. 여섯 그루에서 수도 없는 열매를 보았으며, 먹기보다는 구경거리로 한몫을 해냈다. 맑은 보라가 저런 빛이었구나! 와, 여기에 내린 햇살은 어떠했는데!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에 숨을 멎게 했다. 여기에 부츠가 알뜰한 반찬거리였고, 이웃의 도움으로 자란 토란과 도라지도 대단했다. 귀한 손님 역할을 했던 토란잎과 줄기, 색깔이 신비로웠던 보랏빛 도라지꽃은 으뜸 자랑거리였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취나물과 곰취는 산나물이 아닌 텃밭의 듬직한 식구였다. 한가로이 자리를 지킨 대파와 골파는 두고두고 양념 역할을 했으며, 열무와 배추도 텃밭 여름과 가을을 장식해 주었다. 일일이 셀 수 없는 다양한 식구들, 그중에는 꽃과 나무가 대단한 공을 세웠다.
잔디밭을 장식해준 각종 나무가 큰 역할을 했다. 찰랑찰랑 늘어진 가지에 갖가지 색을 보여 주던 개키버들이 있었고, 진한 빨강으로 색의 조화를 보여준 공작단풍도 있었다. 여기에 초봄부터 봄소식을 알려준 산수유도 빼놓을 수 없다. 초봄에 노란 꽃을 피우고 가을까지 빨간 열매로 장식해준 나무다. 시골집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반송 그리고 불두화와 붉은 열매를 자랑하는 집 보리수나무도 대단했다. 뒤뜰을 커다란 벚나무가 지키고, 밑으론 황매화와 병꽃나무가 자리했다. 시골집을 지키는 두 그루의 주목, 언제나 근엄한 자세였다. 과실나무로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블루베리가 잔디밭에 자리한 식구들이다. 대문 곁에는 하얀 꽃을 피우던 칠자화가 굳건하고, 곳곳엔 단풍나무와 사철나무가 빈틈을 메우고 있다. 자디잔 붉음을 보여주던 홍화 산사나무와 병꽃나무 등 나무기 피워낸 많은 꽃으로 화답했지만 수많은 꽃들의 잔치는 화려했다.
초봄에 이르러 꽃잔디가 한바탕 꽃을 피우며 봄을 알렸다. 겨우내 눈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지만, 조용히 대지에 누워 꽃을 피우자 서서히 영산홍이 붉음을 드러냈다. 서서히 붉음의 꽃잔치가 시작되면 초여름의 꽃, 철쭉이 꽃을 피운다. 붉음과 하양의 철쭉이 어우러지면 작은 앵초부터 분홍빛 금낭화가 주렁주렁 꽃을 피우고, 수선화와 제비꽃이 색깔을 맞춰준다. 보랏빛으로 제비꽃을 무시할 수 없고, 빨강으로 응수하는 패랭이꽃이 화단에 가득했다. 껑충한 서양톱풀이 있는가 하면, 뒤뜰에 자리 잡은 황매화도 꽃을 피워 넘실거렸다. 가냘픈 붓꽃과 밥 티시아가 보랏빛을 자랑하고, 붉은 아스틸베와 노랑을 자랑하는 기린초와 돌나물도 있었다. 하양을 자랑하는 바위취와 칠자화 그리고 만첩 빈도리와 뒤뜰 도라지도 하양으로 화답했다. 여름이 무르익으며 피어난 꽃들도 많이 있다.
초여름에 금계국이 노랑으로 빛내주더니, 꽃범의 꼬리가 분홍으로 맞대응했다. 자잘한 뿌리를 곳곳에 내리며 장마를 뚫고 꽃을 피운 꽃범의 꼬리다. 마당에 한가득 꽃을 피운 꽃범의 꼬리의 분홍이었으면, 대단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노랑의 달맞이꽃이 있다. 노랑으로 낮을 장식하던 황금 낮 달맞이꽃과 하얀 달밤을 장식하던 달맞이꽃에 분홍빛 달맞이꽃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도랑가에는 황금빛 천수국이 흐르는 물과 어울리는 사이 여름이 저물며 구절초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이어서 코스모스가 커다란 키로 응수했다. 하양의 구절초와 빨강 코스모스 속에 자잘한 개미취가 있는가 하면, 나물을 주고난 참취가 하양 꽃을 달고 나타나자 곰취가 황금빛 꽃을 밀어냈다. 수많은 꽃과 나무가 장식해준 골짜기에 겨울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겨울을 준비하는 사이, 벌써 찾아오는 봄 냄새가 맡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굴뚝 연기 속에 해가 넘어가는 사이에도 골짜기는 쉼이 없었다. 아직도 동네 닭이 바스락거리고 작은 도랑이 옹알대며 계절을 노래한다. 초봄을 노래하던 꽃잔디, 바위틈 사이로 몸을 숨겼나 잊고 있었지만 어느 틈에 푸르름을 가득 안았다. 추운 바람이 찾아오자 시들해진 잎은 벌써 누른 빛이 역력했었다. 찾아온 초겨울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어느새 고개를 들고 기운을 차렸다. 어느새 줄기에는 푸름이 가득해져 꿈틀거리고 있다. 겨울 눈에 처절한 몸짓으로 봄을 기다리던 꽃잔디가 겨울 틈을 비집고 삶을 꿈틀거리고 있다. 눈이 내린 골짜기엔 빠꼼하게 눈만 내놓은 도랑물이 옹알거리는 사이, 서산에 머물던 해는 서서히 몸을 감추고 있다. 굴뚝에 훈훈한 연기를 피워내며 추운 겨울을 녹아내려는 골짜기엔 계절이 주는 신비함에 감사해하며 많은 식구들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