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겨울 풍경)
찬 겨울이 골짜기를 찾아왔다. 하얀 눈이 내리더니 바람을 몰고 왔고, 금방 따사한 햇살이 찾아왔다. 골짜기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햇살은 하얀 눈에 내려앉아 한가로운 그림으로 변했다. 햇살이 넘어가며 찬바람이 찾아온 골짜기, 아침 창문을 열자 거대한 얼음 기둥이 나타났다. 기다란 얼음 기둥이 창문을 막아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고드름이다. 얼마 만에 보는 고드름인가? 맑은 물이 얼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오래 전의 기억, 골짜기에 자리 잡은 초가집에도 고드름이 달렸었다. 맑은 빛이 반짝이던 고드름, 손을 뚝 분질러 입에 넣고 빨아먹던 고드름이었다.
가을이 지나자 초가집이 산뜻하게 변했다. 새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이웃과 품앗이로 지붕을 덮는 일, 해마다 시골집의 큰 행사였다. 마당에는 지붕을 단장하고 남은 볏짚이 쌓여 있었다. 겨우내 군불을 지피고 소먹이를 하는 소중한 재산이다. 서서히 겨울이 다가오면서 눈이 왔다. 햇살에 눈이 녹고 흘러내리는 사이 추운 바람은 일을 꾸며야 했다. 흘러내리는 물을 열려 그예 멈추게 한 것이다. 맑은 얼음이 생겨 허공에 매달린 것이다. 초가지붕 위에도 있었고, 마당 볏짚 더미에도 달렸다. 맑은 물이 떨어지는 고드름, 아이들 놀잇감이었고 먹거리이기도 했다. 맑은 하늘 속에 달린 고드름은 한 톨의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골짜기에서 추억의 고드름을 만난 것이다. 하얀 눈도 그냥 있을 리 없다.
봄철 연초록 잎을 내민 공작단풍,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서 잎은 화려하게 변신했었다. 초록에 붉음이 진해지고 드디어 빨강으로 물이 들었다. 어떻게 저런 색깔이 나올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는 색깔로 가을을 노래하던 공작단풍이었다. 초겨울이 되어 서서히 낙엽을 떨군 공작단풍이 눈을 만났다. 초록에 붉음의 빛은 사라지고 순간에 하양으로 분칠을 했다. 나무에서 하얀색이 흘러나온 듯이 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가지마다 하양을 둘러쓰고 눈 내린 하얀 잔디밭에 우뚝 선, 하얀 나무가 되고 말았다. 잔디밭의 하양과 어울리는 골짜기의 진풍경이다. 눈이 쏟아진 도랑에도 진풍경은 벌어졌다.
눈만 빼꼼히 내놓은 도랑물이 옹알대고 있다. 도랑에도 하얀 눈이 내린 것이다. 물 위에 녹아들던 눈발이 지쳐 얼어버린 맑은 얼음은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이다. 맑고도 투명한 얼음 밑으로 도랑물이 흐른다. 밤새 내린 하얀 눈이 얼음을 덮어 눈만 빼꼼하게 보인다. 옹알대는 도랑물이 있고, 그 위에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 지키고 있다. 얼음 위로는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골짜기에 잘 어울리는 물과 투명한 얼음 그리고 눈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작은 도랑을 가로지른 나무다리 위엔 산 식구들 흔적이 가득이다. 오고 간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가느다란 도랑이 주는 진풍경이다. 겨울 선물의 으뜸은 산 위에 앉아 있다.
먼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눈과 햇살의 작품이다. 산마루에서 덩실거리며 내리던 눈, 순식간에 산 가득한 녹음 위에 앉았다. 곳곳의 푸름 위에 하얀 눈이 쌓인 것이다. 짙은 초록이 바치고 있는 하얀 눈, 저런 어울림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여기에 산을 넘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초록에 하양이 가득하고 반짝이는 햇살이 내려앉았다. 하양을 비추고 남은 햇살은 다시 튀어 올랐고, 여기에 산을 넘은 바람이 내려왔다. 반짝임이 일렁이는 초록과 하양 덩어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하양이 이내 흘러내렸고, 푸르른 소나무는 긴 한 숨을 쉰다. 녹음에 남은 햇살은 이내 대지에 흔적을 남겼으니 잘 어울리는 수채화였다.
맑은 햇살 넘어와 녹음 속 하양에 앉은 수채화, 산 말랭이 곳곳에 자리했다. 맑은 햇살 아래 하양이 쌓여있고,
하양이 흘러내릴 즈음 골짜기엔 바람이 찾아왔다. 흐르던 하얀은 얼어붙었고 짙은 녹음과 어우러졌다. 녹음과 하양 속에 처절한 겨울이 얼어붙은 것이다. 골짜기는 온통 하양 천지다. 눈부신 햇살에 그예 손차양을 해야 했다. 처마 밑에 긴 고드름이 추억을 불러주고, 잔디밭 곳곳에도 하양은 칠해졌다. 자그마한 도랑물이 옹알거리는 골짜기엔 작은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산 말랭이 녹음엔 눌러 않은 하양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하양은 이내 지쳐 흘러내렸고, 찾아온 바람은 겨울 속으로 안내하고 말았다. 햇살이 가득한 골짜기에는 아직도 하양만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