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상추의 추억)
한가한 일요일, 느닷없는 형님의 전화다. 텃밭에 상추가 자랐는데 뜯어가라 하신다. 띠동갑인 형님, 갈까 말까를 망설이는 이유는 살고 계신 곳이 40km가 넘는 먼 곳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형수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살아가시는 형님은 작은 농사를 지으신다. 올해도 어김없이 상추를 심어 놓으셨다. 어떻게 할까를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내가 따라나선다. 언제나 말없이 따라주는 아내다. 상추 한 줌을 뜯으러 백 리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냥 갈 수 없기에 시장에 들러 이것저것을 구입한다. 우선은 형님의 먹거리 걱정에 해장국을 사고, 과일도 준비해 발길을 서두른다.
이른 봄에 심어 놓은 상추가 한창이다. 여름날의 보물인 상추는 특별히 소독을 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해마다 자그마한 텃밭에 상추를 심는 이유다. 올해도 어김없이 쌈채소를 심었다. 갖가지 상추며, 쌈추에 쑥갓을 심었고 여기에 케일도 빼놓을 수 없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바라보는 것을 재미로 삼는 텃밭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찾는 텃밭이다. 얼마나 자랐는가도 궁금하고 혹시, 고라니는 오지 않았나를 보기 위해서다. 오늘도 안전함에 안도의 숨을 쉰다.
텃밭을 가득 메운 상추가 갑자기 돌아가신 형님을 불러낸 것이다. 백리를 달려가 뜯어온 상추는 고작해야 몇천 원으로 족하지만, 마음만은 헤아릴 수 없는 값이었다. 시골집 마당 구석에 자란 상추는 임자가 없었다. 형님 홀로 사시면서 얼마나 필요할까? 심심풀이라 하지만 빈 땅으로 놀릴 수 없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텃밭이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기지 못해 텃밭을 일구고 갖가지 농사를 지으셨다.
일손이 부족하면 언제나 불러 주는 형님은 가끔 야속하기도 했다.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길에도 전화가 걸려왔고, 고단함의 달램 속에도 전화는 이어졌다. 홀로 계신 형님을 두고 놀러 가는 것이 죄송해 수백리 여행길 전화에도 서슴없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서둘러 찾아간 집은 썰렁하지만 형님이 이것저것을 심어 놓았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밭에서 일을 하시는 형님, 들어선 방은 어수선하다.
아내는 방정리를 하고 냉장고 속을 청소한다. 화장실을 닦아내는 아내는 오늘도 말이 없다.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하는 아내한테 미안해 눈치를 보는 사이, 온갖 궂은일이 끝내고 밥을 짓는다. 언제나 집 밥을 고집하는 형님이다. 부족한 양념과 먹거리를 준비하며 허덕이는 아내는 아직도 말이 없다. 차려진 밥상을 놓고 마주 앉은 형제는 말이 없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으면 전화를 하셨을까?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없어 죄송한 동생과 느닷없이 찾아 미안한 형님이다.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 세월은 삶의 모습도 생각도 바뀌어 놓았다. 홀로 살아감의 쓸쓸함과 내 삶을 살아내야 하는 분주함은 언제나 부딪쳤다. 가능하면 짬을 내어 찾아가지만, 언제나 부족한 동생이었다. 함 줌의 상추가 주는 오래 전의 기억 속에 맞이하는 아침 생각이다. 작은 텃밭의 상추는 오늘도 무럭무럭 자란다.
먼 곳에 사는 아이들도 생각나는 아침이다. 아무 소독도 하지 않은 청청 골짜기에서 자란 상추, 몇 천원도 되지 않지만 아비의 정성이 담긴 채소다. 멀지 않았으면 두어 주먹 뜯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형님의 생각이었으리라. 그리움과 쓸쓸함을 상추에 실어 동생을 불러댔다. 고마움에 찾아간 동생, 쓸쓸함과 외로움에 전화를 한 형님은 부모와 자식이었다. 아무 말이 없어도 뜻을 알아냈고 고마움을 서로 알았다. 서로를 탓하지 않고 살아온 서러운 세월이 지나간 것이다. 아침나절 한 줌이 상추가 불러낸 기억이었다.
(2024.05.28. MBC 여성시대 방송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