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오는 날)
어둑한 부엌 밥솥에도, 부뚜막에도 찬밥이 없다. 늘 찬밥 한 술이 놓여 있던 곳이다. 비스듬히 기운 나무찬장을 열자 찬밥덩이가 남아 있다. 찬밥을 물에 말아 무장아찌와 함께 먹는 맛, 어둑한 부뚜막 밥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엄마 밥이 그립고 우리 집이 좋아 찾아가는 시골집의 그리움이다. 장손의 손으로 넘어가 다시 그 장손이 차지한 집, 멀리서 바라보는 눈에 물기가 젖어든다.
내 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장남의 장남, 왜 그렇게 장남을 좋아하셨을까? 훗날에 제사상이라도 바라고 하셨을까? 어림도 없는 세월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신 어르신들이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허전함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고향 집, 다른 시골에 자리를 잡고 나만의 집을 만들고 있다. 계절 따라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만의 그리움을 심고 싶어 만들어가는 집인데, 오늘은 아이들이 온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가 살고 있으니 오는 집이다.
산골짜기에 앉은 집은 오는데 불편하고, 삶도 편하지 않다. 대신 자연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계절의 주는 신비함이 있고, 맑은 햇살과 공기가 있다. 오래 전의 내 그리움엔 어림도 없을 테지만 아이들은 얼마만큼 좋아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온다는데 아내는 긴장하고 있다. 반찬을 해야 했고, 이것저것을 서두른다. 당연한 엄마의 마음이지만 왠지 거북하다. 아이들이 왔으면 찾아서 먹고,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나만의 생각으로 되돌아보는 삶, 전혀 다른 삶으로 바뀐 현실이다. 아이들은 무엇이 그렇게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까? 오래전 보다 밥을 두 그릇씩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삶은 훨씬 팍팍해졌을까?
보리밥을 먹어도 마음만은 부자였던 세월, 고기와 먹거리가 넘쳐나도 마음만은 허전한 세월과는 너무 다르다. 이웃을 알았고 어울림을 알았다. 그리움이 있었고 애틋함이 넘쳤다.
동네 입구에 어머니가 오신다. 허름한 치마에 머리엔 무엇인가 얹혀있다. 들에서 막 돌아오시는 어머니, 자식이 왔을까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 여지없이 내 엄마다. 서두르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온다. 기어이 눈가에 물기가 돈다. 얼른 닦아내며 표를 내지 않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안쓰러워 뛰는 둥 달려오신다. 어찌도 그리 반가울까? 얼른 머리에 인 바구니를 안고 돌아오는 집, 그렇게도 푸근한 보금자리였다.
아내와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음은 잘 못 가르침이었다고 투덜대도 말이 없다. 수긍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으나 시대가 그러니 따라서 살라는 뜻이다. 말은 안 해도 알 수 있는 표정인데, 언제나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현명한 아내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정서에 묻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 그리움이 소중해 잊고 싶지 않아서다. 보리밥이면 어떻고 허물어지는 초가집이면 어떠한가? 엄마와 아버지가 있으니 가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우리 집이었다. 허물어져가는 헛간에 암탉이 알을 낳고, 냄새나는 외양간에 암소가 새끼젖을 먹이던 곳이었다.
병아리도 없고 냄새나는 외양간도 없다. 얼마나 살아가기가 좋을까? 하지만, 그 속에는 정이 메말랐고 그리움이 생겨나지 않았다. 반듯한 직선만이 존재하는 곳, 굽어진 곡선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층간소음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고, 저녁마다 관리소 방송소리에 진저리가 났다. 미끄러져가는 곡선의 맛을 알지 못했고,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온다고 한다. 왜 아내는 먹거리를 챙기며 서두르고 있을까? 자식이면 집에 와 널브러진 옷가지도 정리하고, 먹을 것을 챙겨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어수선한 집안을 청소하고, 엄마밥을 차려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아내는 아직도 긴장하며 나물을 무치고, 갈비를 굽는 모습이 불편하다. 아이들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알려주지 못한 세월이 못 마땅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