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골짜기)
여름비 내리는 골짜기는 고요하다. 오로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뽀얗게 깎아진 잔디밭은 온몸으로 여름비를 맞이하고, 연한 분홍으로 장식한 꽃범의 꼬리가 몸을 흔들고 있다. 긴 무더위를 산 너머로 밀어내고 가느다랗던 도랑물의 소리도 불려 놓은 여름비다.
살랑이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자작나무는 잎새의 앞과 뒤를 번갈아 보여준다. 느지감치 알을 낳았는지 이웃집 암탉이 수다를 떤다. 이웃닭들이 품앗이 울음을 울어주는 사이 갑자기 동네는 시끄러워진다. 여름비가 주는 색깔은 보랏빛이다.
우선은 꽃범의 꼬리의 흔들림이다. 자잘한 보라를 안고 꽃을 피운 꽃범의 꼬리, 긴 장마도 잘 버티는 꽃이다. 얼마나 번식력이 좋은지 순식간에 마당을 차지했다. 옮겨 심지도, 바라지도 않던 의욕으로 자리를 넓혔다. 잔디밭 구석에서도 손을 흔들고, 나무밑에서도 분홍을 달았다. 분홍으로 맞서는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몇 해전에 심어 놓은 도라지의 손짓이다. 얼마나 알찬 보랏빛인지 숨을 멎게 한다. 어떻게 저런 보라가 나올 수 있을까? 보랏빛도 진한 보랏빛이다. 도라지의 알싸한 맛보다는 꽃이 보고 싶어 심은 도라지다. 뻘쭘한 키를 불려 작은 바람에도 몸을 흔들며 화단을 지키고 있다. 올해는 보랏빛의 홍수를 만났다.
뒤뜰을 정리하며 긴 자투리 땅이 생겼다. 벚나무 밑으로 자리한 자투리 땅, 길이가 20m는 족하고 폭도 1m 정도이니 꽤 넓은 땅이다. 햇살이 찾아와도 스며들 여지가 없는 음지쪽이다. 어떻게 활용을 할까를 고민하던 차에 맥문동이 떠올랐다. 그늘에서도 잘 자란다는 맥문동이다. 언제나 푸름으로 살아내는 식물이다.
맥문동 200여 포기를 구입해 심기로 했다. 손가락만 한 맥문동을 심은지 2년이 되었다. 언제나 꽃이 필까를 고대하던 중, 올해가 꽃이 피는 해였다. 7,8월에 꽃이 핀다는 소식에 목을 늘이고 고대했다.
드디어 꽃일 필 기미를 알아냈다. 푸름으로 가득한 맥문동 가운데에서 작은 움이 돋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보랏빛을 매단 꽃이 고개를 밀어내더니 곳곳에서 따라나선다. 며칠이 지나자 여기저기에서 보랏빛이 살아났다. 음지에 잘 살아낸다고 하지만 햇살의 힘은 대단했다.
우선은 양지에서 꽃을 밀어냈고, 음지에서도 서서히 꽃을 피워냈다. 꽃범의 꼬리에 도라지가 맞서더니 맥문동이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다. 자그마한 붓꽃이 보랏빛을 지워낸 곳에 보라가 살아난 것이다.
여름비가 찾아온 골짜기의 삶은 신비롭다. 작은 텃밭을 차지한 채소들이 신이 나서다. 벌레들 몰래 심은 열무가 신이 났다. 껑충한 키를 흔들며 여름비를 맞이한다. 여름 상추가 이겨내지 못한 여름비였다. 장맛비가 짓밟고 간 텃밭을 정리하고 가을 상추를 심었다. 무더위에 언제나 시름시름 앓던 상추, 올해는 대 성공이다. 어떻게 참아 냈는지 넓은 잎을 키워냈다. 싱싱함에 신비함을 안고 자란 상추, 여름비에 출렁임이 신비롭다.
대문 앞에는 하얀 칠자화도 꽃을 피웠다. 일곱 개의 꽃을 피운다는 칠자화 동네 나비들이 다 모였다. 하양에 호랑나비가 넘나들고 바람에 일렁인다. 여름 꽃이 한창인 꽃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칠자화였다. 언제나 꽃이 필까 기다리자 어김없이 여름을 빛내주는 사이, 느닷없이 병꽃이 꽃을 피웠다.
초봄에 한창이던 병꽃이 붉음을 이고 되살아났다. 더위가 찾아온 잔디밭에 하양에 보랏빛이 빛나고 여기에 붉음까지 찾아온 여름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다. 서두르는 가을에 눈치가 보였는지 산 넘은 바람도 서늘함이 묻어있는 골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