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또 기다림)
맑은 초록이 핀 나무를 그리고 싶어 연초록 물감을 물과 섞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연초록이 어색해 다시 한번 붓이 갔다. 어김없이 얼룩이 만들어졌으니 이내 그림을 망치고 말았다. 조금 더 기다린 후에 색을 올렸어야 했는데, 긴 아쉬움이 또 기다린다. 기다림, 살아가면서 언제나 지루함과 충돌한다. 기다릴까 아니면 서두를까 또 망설이게 되는 이유다. 삶에는 언제나 기다림이 대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긴 기다림 속에 배우고, 익히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어린 시절을 성큼 뛰어넘어 어른이 될 수는 없다. 긴 기다림으로 삶을 하나씩 배워야 성숙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무를 심었다. 햇볕과 비를 맞으며 나무는 자라고, 겨울을 버티며 타이테를 만들어 간다. 세월의 고단함을 버텨내야 나무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압력 밥솥이 부르르 떨며 밥이 거의 다 되었음을 알려준다. 단, 몇 분을 기다려야 된다는 표시를 무시하고 밥솥을 열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역시 기다림의 인내를 견뎌내야 함이다.
외국여행을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긴 줄을 서서 출국 수속을 받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한 기다림이 있고, 보안 검색을 위한 기다림은 또 어수선하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긴 줄을 만들어야 하니 여행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비행기에 올랐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면 좁은 의자에 몸을 쑤셔 놓고 긴 시간을 기다림 속에 애를 태워야 한다.
운이 좋지 않아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낯선 공항에서 긴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방법 없어 오로지 기다림 뿐이다. 여행은 역시, 길고도 긴 기다림의 연속이듯이 삶도 역시 기다림이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다려야 한다. 긴 겨울 동안 한 해의 농사 준비를 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봄철이 왔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길 기다렸으며, 햇살과 비가 오길 기다림이 있다. 여기에 열매를 맺고 익기를 학수고대하는 농부의 마음은 언제나 간절한 기다림이다.
수많은 공사를 하는 현장도 예외일 수 없다. 터를 닦아 다져지길 기다려야 하며, 시멘트가 굳어지길 긴 세월 기다려야 튼튼한 건축물이 탄생한다. 곰삭은 술맛을 뛰어넘을 맛은 없다. 긴 세월 동안 오크통에서의 인내는 커다란 맛이 오고, 세월을 감탄하게 한다. 와, 이런 맛을 주려 긴 세월을 기다렸구나!'
무릎을 치는 감탄 소리는 역시, 세월의 기다림이 준 아름다운 맛이었다.
음악을 하면서도 기다림이 이어져야 한다. 기다림은 시간과의 어울림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과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다. 음악 연주, 적당한 기다림 끝에 만나는 시간과의 만남은 멋진 연주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절대적인 요소다. 기다림 없이 불쑥 나타나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었고 소음에 불과하다. 소음이 아닌 멋지게 어우러짐은 기다림과의 무한한 약속이어야 한다. 모든 삶에서의 기다림은 시간과의 어우러짐이다.
예술이 어렵지만 수채화도 쉽지 않음을 알게 한다. 물감을 만들어야 하고, 물과 섞어야 한다.
물감을 섞는 일과 물과 어우러지는 현상을 긴 세월을 기다리며 이해하고 숙달해야 한다. 순간마다 달라지는 색의 조화, 기다림만이 알려준다. 섣불리 섞어낸 물감은 어색하고, 어설픈 물과의 만남은 전혀 다른 색깔이다. 역시, 기다림 속에 물과 물감의 조화를 알아내야 한다. 긴 인내로 색을 입혔다. 하얀 백지 위에 입혀진 물감, 긴 기다림으로 올려진 색깔은 전혀 다르다. 긴 기다림은 수채화를 위함보단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함이었다. 그 기다림의 소중함을 긴 인고의 세월이 알려주었다.
긴 겨울을 기다린 봄이 기색을 드러냈다. 수선화가 촉을 내밀었고, 튤립도 두리번 거린다. 꽃잔디는 벌써 푸름을 먹고 고개를 들었다. 산수유는 어설픈 노랑으로 거만을 떤다. 긴 기다림으로 봄을 맞이한 골짜기 식구들이 일어나는 계절이다. 겨울의 이겨낸 기다림이 아름다운 봄을 예약하고 있듯이, 삶에도 어김없는 기다림이어야 성숙함을 건네준다. 그림이 그러했고, 음악이 그러했으며, 운동이 그러했다. 오늘도 긴 기다림으로 하나씩 삭혀가는 또 하루의 시작,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닌 삶을 익혀내는 저음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