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를 지키며 줄곧 뻥튀기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잘난 자식은 멀리 가고, 좀 못난 자식은 곁에 오래 남는 법이야."
매일 장사를 돕던 할머니의 나이 든 아들은 그날도 트럭 한 구석에 쭈그려 뻥튀기를 팔았다. 할머니 말대로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가서, 사람을 늘 아쉽게 만든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 참 익숙하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에 덜 가진 것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여 번번이 찾아온다. 사람의 욕심은 고장 난 라디오다.
조리원에 있으며 이 점을 생각했다.
조리원 투숙객들은 산모와 배우자 그리고 아기다. 저 마다 사연이 있고 건강 상태도 천차만별이다. 산모 중에는 나 같은 약체가 있는가 하면 부종도 거의 없고 활기가 넘치는 이도 있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개인일 뿐인데, 그러니 다른 것이 당연한데,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레 비교를 하게 된다. 이 자연스레가 문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 병든 트리케라톱스가 들판에 누워 괴로워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옆에는 녀석이 배설한 대변이 어른 키만큼 산적해 있었는데, 산후 8개월 즈음 현재 나는 이 글을 쓰며, 그 트리케라톱스야말로 체격, 건강, 배변 활동을 통틀어 당시 나의 상태를 표현할 대체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무릎을 탁 내려쳤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 같이 육중했으나 끝내 화석이 된 백악기 공룡과 같이, 내 몸과 마음은 풍화되고 있었고, 아세트아미노펜을 먹거나, 몸져눕거나, 아세트아미노펜을 먹거나, 초록색 피라미드 응가를 배출하거나, 아세트아미노펜을 먹거나 하는 일상 속에 아기에게 배불리 젖을 먹이는 다른 산모를 물끄러미 보다가 사타구니를 스치는 예리한 통증에 서글퍼했다. 그러면 품 안에서 빈 젖을 물던 나의 아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엉엉 성난 울음을 토하고, 나는 황급히 신생아실로 가서 분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아기는 분유로 분노를 다스리다 잠에 빠지고, 나는 숨을 돌리듯 고개를 들었다.
그 무렵에는 모유 수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유방 마사지를 하고, 유축도 틈 나는 대로 했다. 밥은 말할 것도 없이 다 먹었다. 밥때가 되면 밥상을 문가에 두고 방문을 활짝 열어뒀다.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두가 충분히 남기는 와중에 모조리 털어마시고 가장 아파했다. 조리원 직원들은 그런 나를 이상히 여겼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의 고양이들을 걸고 맹세코 거짓 없이 아팠다. 종교에 귀의하고 싶었다. 정말로 영양섭취와는 별개로 건강이 회복되는 느낌이 없었기에 당사자인 나는 허탈했다.
'허탈해도 별 수 있나.'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2주가 흐르고, 엉엉 우는 아기를 달래며 집에 돌아왔다. 다시 한번 느낀 건데, 나의 안부와 달리 세상은 변함없이 잘 있었다. 사람은 우주 속의 참 작은 생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