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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May 19.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04 Greenery 15-0343

아마도, 그 이후부터 나는 조금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일상이라고 해봐야 무언가 엄청난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이전의 삶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전부다. 오선지에 빼곡하게 적혀있던 음표가 사라질 때, 적어도 그 흔적은 남겨질 것 같은데 무엇으로 지웠는지 정말 매끄럽게도 깔끔하게 지워졌다.


이전의 일상은 이제 무의미해진 것과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무료했던 성실함이 사라지니 그 공간을 채울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왜 그냥 빈 공간으로 두면 안 되는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아무래도 채워져야 할 대상이었다. 클래식 음악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은 단번에 알았다. 그 음표 또한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방황을 이어가던 그 무렵에 나는 우연히 A를 만나게 되었다. A가 나를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적한 카페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A가 불쑥 말을 건네 왔다.


그 기억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꽉 채워져 있던 공간에, 갑자기 어느 날 구멍이 생긴다면 그 구멍은 채워져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대로 남겨두어도 이상하지 않을까? 적당히 괜찮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고리타분한 하루네, 그렇지?"


맨 처음에는 나에게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이 카페에 혼자 오기도 했지만 더더욱이나 학교 친구 중에 여자인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음성이 향하는 방향이 너무 정확하고 또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뚜렷하게 들려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들고 보고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책의 다음 페이지로 그 시선을 돌렸다. 무엇보다 나에게 말을 건 것이라고 해도 카페에서 만날 친구를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래도 귀찮아지는 일들이었다.


'아, 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아 미안해요. 친구인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듣고 또 다음 대답으로는 '그렇군요, 괜찮아요.' 등등 너무나 많은 대화들이 오고 가야 한 다는 점도 괜히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다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책을 그렇게 재밌게 읽어?"


이번에는 1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처음 보는 A가 나를 보며 서있었다. 마치 아까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A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다면, 밖으로 나갈래? 너무 고리타분한 하루야. 여기 있다간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아. 안 그래?"


모두 뜬금없는 말에 잠시 '이상한 여자인가?'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를 않나, 하루가 고리타분하다고 하지를 않나 그리고 대체 뭐가 멈춰버릴 것 같다는 건지 하나같이 이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도 모르는데 반말이라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지극히 당연했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잠시만, 근데 나 알아?"


끊임없이 건네 오는 A의 말 가운데, 적절한 틈을 찾아 가장 원초적인 것부터 물어봤다. 뭐가됐든 이게 풀리지 않으면 모든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테니까.


"아니, 모르는데. 근데 뭐 어때서?"


잠깐 생각을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기억을 찾는 고민의 순간도 필요 없다는 듯이, 바로 돌아온 A의 대답에 꽤나 당황스러웠다.


모르는 사람한테 대체 왜 그러는지... 참 이해하기 힘든 하루가, 어느 때보다 한적한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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