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 ‘정’ 이야기
2박 3일의 빡빡했던 일본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형식은 지난밤에 있었던 술자리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최대한 빨리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대로 1시간만 자자. 그럼 좀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그런 형식의 바람은 비행기가 이륙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모녀 때문에.
“수연아. 이건 뭐야? 공짜로 주는 건가?”
‘수연’으로 불리던 젊은 여자는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50대 중반의 여자의 손에 들린 직사각형의 종이봉투를 보고 귀찮은 어투로 툭 내뱉었다.
“토할 것 같으면 쓰라는 봉투네. 그냥 냅두고 잠이나 자.”
“그럼 이거는? 면세품 책자는 아닌 것 같고... 회사 홍보지인가?”
그렇게 말하는 중년 여성의 손에 들린 책자를 젊은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홱 낚아챘다.
“아 그냥 잠이나 자라니까? 엄만 피곤하지도 않아?”
뭘 자꾸 저렇게 자라고 하는 거야. 궁금하면 물어볼 수도 있는 거지....
형식은 덩달아 자신마저 민망해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여행지에서 싸우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데... 나중에 후회할 텐데.
형식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엄마가 문득 떠올랐다.
“요즘 소화가 좀 안 되네.”
“그래? 소화제는 먹었어?”
“먹었지. 근데 별 효과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엄마의 모습이 형식은 조금 못마땅했다.
“그럼 병원을 가. 내시경이라도 좀 해보든지. 뭘 미련하게 계속 약만 먹고 있어.”
“그래야겠다. 날 밝으면 가봐야지.”
그러고 나서 한 달 뒤. 형식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간암이었다.
그게 엄마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을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형식은 또다시 드는 자괴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형식에게 말을 걸었다.
“...... 그렇죠?”
“예...... 예? 아..... 그... 그렇죠?”
방금 전까지 무어라고 혼자 궁시렁거리던 것 같긴 했지만 딴생각에 빠져있던 형식은 그녀가 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냥 그렇다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중년 여성의 얼굴이 다소 시무룩했기에. 딸한테 또 뭐라고 한 소리 들었나....
형식은 기내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여성의 눈이 작게 커졌다.
“어, 여기 어제 우리 갔던 데 아니야?”
“.... 어디.”
“여기 여기. 다... 자이후 덴만구? 무슨 학문의 신인가 뭔가 모신다던 그 신사!”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며 본격적으로 자려고 자리를 잡는 듯했던 젊은 여자가 중년 여성에게로 슬쩍 어깨를 붙여왔다.
“아, 맞네. 거기.”
“여기 참 괜찮았는데. 벚꽃도 많고. 그치?”
“그랬지. 예뻤었지 거기.”
어느덧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 형식은 생각했다.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고.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다음에 또 같이 가자.”라는 엄마의 말에 “그래, 시간 봐서”라고 말하는 딸이라면 적어도 자신처럼 후회할 일을 만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엄마나 보러 갈까...’
어느새 여행 이야기로 화기애애해진 모녀를 보며 형식은 이제야 마음 편히 눈을 감고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매주 1편씩은 써서 올리는 것을 목표로 다시 엽편소설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
재밌게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