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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Jul 05. 2024

[소설] 호구의 탄생

엽편소설 - '정' 이야기

살면서 윤아는 크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윤아는 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생각으로 무던히 넘어가려 애썼다.


그런데 윤아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중고 유모차를 시세보다 싸게 팔면서도 별도로 구입해야 하는 액세서리까지 정가의 50% 할인된 가격에 사겠냐는 판매자의 권유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받아들였던 것부터?


아니면 지난달에 구매했고 실제로 사용한 횟수는 얼마 안 된다는 판매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이? 아니면 판매자가 올린 사진상에서 손잡이 부분에 흠집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바보같이 상세 사진을 요구하지 않았던 게 원인이었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찜찜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도 구매 버튼을 누를 당시의 윤아는 그 모든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산 지 얼마 안 된 시세보다 저렴한 유모차를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을 뿐. 그렇게 산 유모차가 오늘 도착했고, 바로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유모차는 오직 뽁뽁이로만 꽁꽁 감싼 상태로 배송되었다. 거기에서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중고거래가 처음인 윤아로서는 이게 정상적인 포장인지 아닌지 구별해 낼 기준이 없었다. 다만 뽁뽁이로만 둘둘 싸여있는 유모차를 봤을 때, 윤아는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윤아는 이 유모차를 사는데 70만 원을 썼다. 정가인 90만 원에 비하면 20만 원이나 싸게 산 것이었지만 그래도 70만 원이라는 금액은 버는 돈 없이 집에서 육아만 하는 윤아에게 있어서는 꽤나 큰 거금이었다.


한번 살 때 제대로 된 유모차를 사고 싶다는 욕심에 큰맘 먹고 산 건데, 시작부터 이런 초라한 포장이라니. 윤아는 뽁뽁이 위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테이프를 칼로 뜯으며 그냥 20만 원을 더 내고 새 제품을 샀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20만 원이면 애기 옷을 몇 벌은 더 사고 주말에 외식을 몇 번은 더 할 수 있는 금액이다. 포장이 좀 별로지만 물건만 괜찮으면 상관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북북, 몇 겹씩 말아놓은 뽁뽁이를 뜯어내던 윤아는 유모차의 양쪽 프레임에 검은색 매직 같은 걸로 급하게 덧발라 놓은 것 같은 흔적을 본 순간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하지만 윤아는 그 상황에서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중고품이니까 이 정도는 참고 써봐야지. 중요한 건 아기가 안 울고 잘 타느냐 마느냐니까.


윤아는 바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뒤 집 앞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아기는 한 번도 울지도 않고 여기저기 바쁘게 고개를 돌려가며 유모차 안에서 편안히 산책을 즐기는 듯했다.


그런 아기를 보며 윤아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구매 확정 버튼을 눌렀다. 외견이 좀 불 품 없긴 하지만 20만 원이나 저렴하게 샀고 아기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이 정도는 감수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산책을 끝내고 아기를 재운 뒤 현관문 밖에 세워둔 유모차를 접어서 집 안에 넣어두려던 윤아는 문득 프레임 안쪽에 붙어있던 정품 씰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2023/02’라는 제조일자가 떡하니 써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윤아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사기를 쳐?! 윤아는 다급히 중고 거래 어플을 켜고 자신이 거래한 유모차의 판매자 페이지를 다시 한번 들어가 봤다.


[2024년 3월에 샀습니다. 사용 빈도는 그리 높지 않으며...]


분명 올해 3월에 구입했다는 유모차의 제조일자가 1년 전 것이라니. 사실 구매일자와 제조일자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법은 없다. 제품에 따라 1년 전 모델을 올해 사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하지만 윤아가 이번에 산 유모차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윤아가 산 유모차로 말할 것 같으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생산하는 족족 판매가 되더니 급기야 예약을 걸어도 약 반년 이상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대 히트 중인 상품이었기에 1년 전 제조된 모델을 지난달에 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모차 여기저기에 난 잔 흠집과 사진상으로 봤을 땐 그저 스쳐서 생긴 흠집 정도로 생각한 손잡이 쪽 흠집도 가볍게 긁힌 게 아닌 마치 어딘가에 찍힌 것처럼 깊게 파여 있는 것도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한 달 전에 산 유모차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윤아는 환불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이미 거래는 종료된 상황이었다. 판매 사이트에 문의글을 남겼으나 종료된 거래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대응해 줄 수 없다는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미치고 팔짝 뛴다는 게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하고 윤아는 마치 남 일처럼 생각했다. 아니, 남일인 양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그러니까 잘 좀 알아보고 사지.”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퇴근 후 돌아와 윤아의 하소연을 듣던 남편이 하는 말 한마디에 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기야말로 내가 좀 봐달라고 할 때 뭐라고 그랬어? 그냥 대충 보고 알아서 사라며? 그런데 이제 와서 뭐? 잘 좀 알아보고 사지??”

“아니, 내 말은...”

“나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려고 여기저기 발품 팔고 겨우 산 건데. 뭐?? 잘 좀 알아보고 사지???”

“일단 좀 진정을 하고...”

“진정?!!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


윤아는 미친 사람처럼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는 짜증과 분노를 마구 쏟아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새 거 사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럴 돈 없다며 딱 잘라 말한 당신 때문에! 어떤 게 더 괜찮은지 같이 좀 봐달라고 했을 때 알아서 사라며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당신 때문에!! 주말에 아기 좀 봐달라고 하면 피곤하다고 침실에 쏙 들어가서 잠만 퍼질러 자던 당신 때문에 내가 이런 거지 같은 유모차를 샀다고!!!”


날카로운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윤아는 사실 알고 있었다. 정말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윤아는 이 거지 같은 유모차를 산 지 얼마 안 된 상태 좋은 유모차로 둔갑하여 판 판매자도, 함께 고민하며 유모차를 골라주지 않은 남편도 아닌, 누더기 같은 유모차를 그렇게나 비싸게 주고 산 자기 자신에게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면서 이토록 크게 화를 내본 적 없던 윤아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이 지금의 윤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 것만이 지금의 윤아가 스스로를 지키고자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윤아가 이용한 중고 거래 어플에 새 글이 하나 올라왔다.



2023년 2월에 제조된 제품입니다. 전 주인분이 워낙 험하게 써서 여기저기 흠집이 많아요.

제가 구입한 금액에서 20만 원 더 저렴하게 올립니다.
반품이나 환불, 네고는 절대 불가합니다.

편하게 막 쓰실 세컨드 유모차로 저렴하게 데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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