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 '정' 이야기
텅 빈 한글창을 들여다보길 몇 시간째. 지윤은 커다란 한숨과 함께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이번에야말로 소설을 쓰겠다며 매일 아침 새벽 5시에 일어난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 사이 지윤은 몇 번인가 한글창을 열고 무언가 끄적이긴 했지만 그렇게 나온 소설은 죄다 지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근 준비나 하자...’
지윤은 경기도 소재의 한 중견기업에서 일했다. 특근수당도 없으면서 퇴근 후는 물론 주말까지 당연하듯 이어지는 업무를 군소리 없이 하는 중이다. 거의 5년 가까이나.
지윤의 업무는 수출입 업무였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마당에 수출입이라니. 전공과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일을 하면서도 지윤은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지윤에겐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신춘문예 당선 후 화려하게 작가로 데뷔하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소설을 좋아했던 지윤이 소설가를 꿈꾸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학창 시절엔 교내외에서 열리는 글쓰기 대회를 나갔다 하면 무슨 상이든 꼭 하나씩은 탔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예술대학의 문예창작과에까지 진학한 지윤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의심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윤은 매년 진행되는 신춘문예에서 늘 고배를 마셨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이름이 실리는 새해 첫 조간신문에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그의 동기나 선배, 친구들의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지윤은 매번 무너졌다.
그렇게 최악의 새해를 맞이한 지도 어언 3년이 지났고 그런 지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반강제적으로 지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준 곳이 바로 지금의 회사였다.
지윤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래. 일단 돈을 벌자. 소설가로 등단을 해도 한동안은 벌이가 시원찮을 것이니 그때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소설은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쓰면 되지 뭐.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는 지윤이 입사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일단 회사 일이 너무 많았고, 용어들도 너무 생소했다. 비전공자인 지윤이 회사 일을 따라가려면 근무 중에는 물론 퇴근 후에도 따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신춘문예 접수는커녕 습작용 소설조차 쓰지 못한 채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지윤은 회사일은 어느 정도 손에 익었지만 소설을 쓰는 손은 굳었다. 소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다시 쓸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아예 소설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윤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데뷔도 못한 채 서른을 맞이하다니. 이건 자신의 인생 계획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윤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등단을 하고 지금쯤은 단행본 한 두 권 정도는 내야 했지만 현실은 그저 자신이 당선되고 싶었던 문학상의 작품 수상집이나 매년 사서 모으고 있는 신세다. 그마저도 다 읽지도 못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냥 확 다 때려치우고 집 안에 틀어박혀 소설만 써볼까? 싶다가도 지윤은 다음 달에 내야 할 카드값을 생각하면 막상 실행에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지윤의 마음에 크게 동요가 일게 된 일이 터졌다. 또 한 명의 소설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 중에서.
“그동안 말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작품집 나오기 전까진 저도 실감이 잘 안 났거든요.”
자신의 앞으로 쓱 내밀어진 책에는 지윤이 가장 받고 싶었던 문학상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아니.... 언제 이런 걸 다 썼어....?”
축하한다, 정말 잘됐다,라는 말이 빈말로라도 나오지 않았다. 지윤은 이 순간이 그저 어색하고 거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땅바닥에 구멍이라도 뚫어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전부터 소설을 좋아해서 쭉 읽기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이렇게 계속 읽지만 말고 한번 써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회사 다니는 틈틈이 그냥 썼어요. 이렇게 큰 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지만...”
그녀가 받은 문학상은 상금만 5천만 원이 넘었다. 그만큼 매년 경쟁률도 치열했다. 지윤은 그녀가 자신의 일 년 연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상금으로 받았다는 사실보다 회사 다니는 틈틈이 ‘그냥’ 썼다는 그녀의 말이 더 불편했다. 자신은 결코 해낼 수 없던 그 일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는 듯이 들려서. ‘그냥’ 하면 되는데 그 쉬운 일을 왜 너는 못했느냐고 마치 질책을 받는 것만 같았다.
“그럼 앞으로는 소설만 쓰는 거야?”
“아니요? 회사는 그대로 다닐 거예요.”
“왜?”
“이제 겨우 한 권 낸 건데요 뭐. 언제까지 이 행운이 이어지리란 보장도 없고 그만큼 제 능력에 대해 자신감도 없어요. 그냥 계속 회사 다니면서 또 틈틈이 써보려고요.”
산뜻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지윤은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껏 등단은커녕 제대로 된 소설 한 편도 쓰지 못한 것은 '신춘문예 당선 후 등단'이라는 자신의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너무 크고 화려한 꿈은 오히려 사람을 위축시킨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걸고 뛰어들어야 겨우 이뤄질까 말까 한 꿈에 붙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옆에 있던 누군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꽃도 좀 보고 풀도 좀 만져보고 청량한 공기도 한껏 들이마시면서.
지윤은 문예창작과를 전공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습작 소설조차 써본 적이 없다던 그녀가 한 번에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꿈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오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저녁. 집에 돌아온 지윤은 책장에서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는 못했던 문학상의 작품집을 죄다 꺼냈다.
이걸 다 읽으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릴 것 같지만 그럼에도 지윤은 이번에야말로 다 읽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너무 피곤하다’와 같은 핑계는 대지 않기로 했다. 아니, 댈 수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가 나타난 이상 더 이상의 변명은 하려야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제야 지윤은 알아차렸다. 어쩌면 자신은 회사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해 회사 핑계를 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것을.
언젠가 나도 ‘쓰기만 하면’ 잘 될 거라는 헛된 꿈을 꾸며 회사라는 물속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마치 온탕 속 개구리처럼 그것이 자신의 몸을 익히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뜨거운 물이란 것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지윤은 낮에 동료가 준 작품집부터 펼쳐 들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