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 '정' 이야기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
서서히 닫히는 현관문 틈 사이로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미진은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후다닥 드레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모자와 선글라스, 카드지갑을 챙기는 미진의 행동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집 밖으로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한 미진은 다급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미진의 시선이 점차 바닥을 향했다. 그러자 편해서 늘 신게 되는, 하지만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되어 다 낡아빠진 자신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산다, 산다 하면서도 계속 이 신발을 고집했던 건 외벌이인 미진의 가계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내년에 대학생이 될 첫째 아들과 벌써 중학교 3학년이 된 둘째 딸을 위해 미진은 지난 20여 년간 최대한 아끼고 절약하며 살았다.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사고 싶은 것도 참고,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며 버틴 지난 20년의 결혼생활은 늘 좋기만 하지도, 그렇다고 늘 나쁘기만 하지도 않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미진의 아들과 딸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고, 남편 또한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지금의 회사에 20년 이상 장기근속 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진은 이대로 남편의 정년 퇴임 때까지 몇 년만 더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일정치 않아진 귀가 시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낯선 향기. 평일이고 주말이고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늘 서재로 숨듯이 뛰어 들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미진은 확신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그날 이후, 미진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남편의 출근 시간과 귀가 시간을 체크하고, 아무렇지 않게 벗어둔 남편의 빨랫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뒤적이다가 주저앉아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과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미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지어냈다. 아이도 남편도 아직은 자신의 상태를 알아서는 안 되니까.
미진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확실한 물증을 잡기 전까지는 평소와 같은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비록 자신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지옥 불구덩이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을지언정.
‘이혼하면 신발부터 새로 살 거야.’
미진은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애꿎은 바닥을 퍽퍽, 내려쳤다. 그 사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미진은 다급히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까지는 걸어서 약 15분이 걸린다. 남편이 집을 나선 지가 10분 정도 지났으니 서두르면 같은 전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미진은 모자를 푹 눌러쓴 뒤 최대한 빨리 발을 움직였다. 역사에 들어서고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은 뒤 승강장으로 올라가자 이제 막 들어온 전철을 타는 남편의 뒷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미진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전철에 올라섰다.
“휴.”
깊게 나오는 호흡을 잘게 쪼개어 쉬면서 미진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건가. 미진은 새삼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달리 방도가 있지 않았다.
사람을 쓰기엔 아무런 경제권이 없는 미진의 상황상 금방 들통이 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미진은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체 얼마나 잘난 여자이기에 20년 평생 자신만 바라보고 살았던 남편이 다른 맘을 먹게 되었나 해서.
-다음 역은 시청. 시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어느새 남편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미진 역시 내릴 채비를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남편의 성격상 전철에서 내릴 때가 되면 누구보다도 빨리 일어나 가장 먼저 전철 문 앞에 서 있어야 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앉아있는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내려야 할 역은 물론 그다음 역에서도, 그 다다음 역에서도.
‘뭐지? 아니 이 남자가 혹시 출근도 안 하고 아침 댓바람부터 여자 만나러 가는 거야???!’
한 역, 한 역을 지나칠수록 미진의 마음에도 차곡차곡 분노가 쌓였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드디어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철 문 앞에 서는 것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귀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미진은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낼 순 없지. 오늘이야말로 확실한 물증을 잡고야 말겠어.’
자신의 이런 마음을 1도 모를 남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미진은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나와 조용히 남편의 뒤를 밟았다.
집에 돌아온 미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온몸도, 흙먼지가 가득 묻은 신발도 뒷전이었다. 미진은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까지 이어진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 제수씨... 아직 모르고 계셨구나. 민재 그 녀석, 얼마 전에 권고사직 당했어요. 한 한 달쯤 전이었을 거예요.
한 달이라면 남편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럼 그때부터였던 건가. 남편이 이런 생활을 해온 것이.
미진은 방금 전에 본 남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머리에는 안전모를 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낡은 안전복을 입은 남편의 모습이.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큰 소리를 쳐도 찍소리도 못하며 그저 굽신거리던 남편의 모습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채 닦을 새도 없이 벽돌을 나르고, 또 나르던 남편의 모습이.
“흐윽, 흑, 끄읍-, 흐윽.”
참을 새도 없이 터진 눈물을 엉망으로 토해내며 미진은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