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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디 Jan 11. 2020

걸어온 길들은 걸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아름답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일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찰나가 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일상일 뿐인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현실을 적나라하게 실감하는 순간 말이다. 그날 밤은 꼭 그런 날이었다.


늦은 새벽, 잠자리에 들기 위해 뒤늦게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잠에 든 남편이 혹여나 깨기라도 할까 봐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잠귀가 밝아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깨는 남편은 그날따라 무척이나 피곤한 모양이었는지 내 인기척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잠에 들었는데, 그날은 먼저 잠든 남편 옆에서 홀로 잠을 청하려니 영 허전하고 심심한 게 말이 아니었다. 자고 있는 남편의 가슴팍으로 귀찮게 머리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남편을 가만히 쳐다만 보다가 잠에 들려는 찰나, 나는 어떤 낯선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것은 아닌 밤에 생뚱맞은 현실감각이었다.


'내가 정말  남자랑 결혼을 했다니! 우리가 진짜 같이 살다니!'


옆자리에 누워 고이 단잠을 자는 남편은 더 이상 몇 분 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그 시절 내 남자 친구, 내가 열렬히 사랑한 나의 애인이었다. 등 돌려 자고 있던 남편이 이내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몇 번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캄캄한 방, 그의 숨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아기 같은 얼굴로 잠이 든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가 솟구쳤다. 꼭 연애할 때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무방비상태로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괜스레 딱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바보같이 나만 좋아해 주던 무구한 그 청년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벅차오르는 고마움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던 두 눈을 생각하면 특히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히 아름다운 일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생에 가장 빛나는 20대 청춘을 함께 걸었다는 그 사실은 새삼스럽게도 내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사랑에 목숨 걸고 작은 일에도 크게 울고 웃던 두 남녀의 시간, 모든 것이 서툴고 또 새롭던 우리의 사랑은 몹시도 뭉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지난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런 날이면 나는 삶 아니면 죽음뿐인 인생에서 너무 죽음만 바라보며 살아온 건 아닌지 생각한다. 가끔은 걸어온 길을 돌아보기만 해도 삶이 조금은 더 고마울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장 오늘 저녁식사의 메뉴나 내일 미팅 때 입고 갈 옷, 다음 주에 있는 가족 행사, 일 년 뒤의 우리의 통장 잔액, 오 년 뒤에 이사 갈 집. 지독하리만큼 지독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온 지난 길을 잊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과거의 기억들은 때때로 오늘의 우리를 보는 거울이 되는 것 같다. 삶은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며, 선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모든 점들의 순간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좋아도 미워도 나의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게 너무 앞만 보며 살지 말라고, 가끔은 걸어온 길을 좀 돌아봐 달라고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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