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일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찰나가 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일상일 뿐인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현실을 적나라하게 실감하는 순간 말이다. 그날 밤은 꼭 그런 날이었다.
늦은 새벽, 잠자리에 들기 위해 뒤늦게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잠에 든 남편이 혹여나 깨기라도 할까 봐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잠귀가 밝아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깨는 남편은 그날따라 무척이나 피곤한 모양이었는지 내 인기척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잠에 들었는데, 그날은 먼저 잠든 남편 옆에서 홀로 잠을 청하려니 영 허전하고 심심한 게 말이 아니었다. 자고 있는 남편의 가슴팍으로 귀찮게 머리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남편을 가만히 쳐다만 보다가 잠에 들려는 찰나, 나는 어떤 낯선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것은 아닌 밤에 생뚱맞은 현실감각이었다.
'내가 정말 이 남자랑 결혼을 했다니! 우리가 진짜 같이 살다니!'
옆자리에 누워 고이 단잠을 자는 남편은 더 이상 몇 분 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그 시절 내 남자 친구, 내가 열렬히 사랑한 나의 애인이었다. 등 돌려 자고 있던 남편이 이내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몇 번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캄캄한 방, 그의 숨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아기 같은 얼굴로 잠이 든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가 솟구쳤다. 꼭 연애할 때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무방비상태로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괜스레 딱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바보같이 나만 좋아해 주던 무구한 그 청년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벅차오르는 고마움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던 두 눈을 생각하면 특히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히 아름다운 일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생에 가장 빛나는 20대 청춘을 함께 걸었다는 그 사실은 새삼스럽게도 내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사랑에 목숨 걸고 작은 일에도 크게 울고 웃던 두 남녀의 시간, 모든 것이 서툴고 또 새롭던 우리의 사랑은 몹시도 뭉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지난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런 날이면 나는 삶 아니면 죽음뿐인 인생에서 너무 죽음만 바라보며 살아온 건 아닌지 생각한다. 가끔은 걸어온 길을 돌아보기만 해도 삶이 조금은 더 고마울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장 오늘 저녁식사의 메뉴나 내일 미팅 때 입고 갈 옷, 다음 주에 있는 가족 행사, 일 년 뒤의 우리의 통장 잔액, 오 년 뒤에 이사 갈 집. 지독하리만큼 지독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온 지난 길을 잊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과거의 기억들은 때때로 오늘의 우리를 보는 거울이 되는 것 같다. 삶은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며, 선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모든 점들의 순간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좋아도 미워도 나의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게 너무 앞만 보며 살지 말라고, 가끔은 걸어온 길을 좀 돌아봐 달라고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