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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별 Aug 04. 2022

정체

스탠드 업 코미디, 공간 대여해 드립니다. 현대판 마녀사냥의 장으로

충분한 수의 아군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그의 단어 선정에서 드러난 광기가 말해준다. ‘여자’를 모욕으로 사용하는 사회에서 웬만한 여성 혐오 표현에는 단련되어 있다고 믿었지만, ‘아빠가 결혼한’이라는 수식어를 단 성적 비하 발언에는 잠시 전의를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엄마라는 성역까지 스스럼 없이 침범하다니,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는 “애들 머릿속이 이렇다고”라는 말로 한 발 빠져나갈 여지를 마련했지만, 그때 든 생각은 ‘마치 무당 같네’라는 감상뿐이었다. 내 입을 통해 나오지만 내 생각이 아닌 신의 생각인 것처럼 내 입을 빌려 아이의 생각을 말한 것 뿐이라는 덧붙인 말. 그의 말대로, 말도 못하는 3살 짜리 아이가 어떻게 자립을 박탈 당한 여자들의 유구한 역사를 알고, 그 짧은 순간 치미는 분노를 남성들 간의 유대를 다지는 방식으로 더 강한 남자에게 고자질해 여자를 응징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데까지 갔을까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번진 것은 이 코미디언 한 명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것은 코미디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연관이 있다. 코미디언은 대중의 통념을 활용해 코미디를 만들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전형성을 이용 또는 역이용하거나 기정사실화 된 전제의 허점을 공략하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코미디언 각자의 개성과 재능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코미디를 접할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코미디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있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코미디언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가지고 웃길 수 없다. 냉소나 야유, 침묵 역시 코미디언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반응들이다. 웃음으로 동조하든, 냉담함으로 반감을 표하든, 반응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모르는 개념에 대해 동의나 비동의를 표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의 코미디를 보고 웃은 사람의 머릿속에도, 불쾌함을 느낀 나의 머릿속에도 그들이 인지한 것과 같은 사회 구조의 설계도가 심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 설계도가 태생부터 지닌 한계에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느낀 무력감과 자신의 무능감에서 오는 절망과 분노를 약자들에게 분출할 수 있는 유인을 내포한 구조, 여기서 이 코미디언이 한 일이라곤 한 번도 쉰 적 없는 활화산에 불씨를 당긴 것 뿐이다. 이게 바로 집단적인 광기가 발화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날리는 화산재 속에서는 약간의 성찰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타르시스가 폭발한 축제 끝의 열기 속에는 오직 거리낄 것 없는 후련함만 있을 뿐이었다. 비로소 나는 내가 느낀 위화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있었다.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고, 후련함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완수했을 때 찾아오는 개운함이다. 이제 나는 그들이 느낀 기묘한 승리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감정의 정체는 죄인을 단죄했다는 정의감이었다. 어리석고 교화시켜야 할 존재를 갱생시키고 있다는 믿음, 약자를 괴롭히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떳떳함에서 오는 잔혹성,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당당함에서 기인한 희박한 죄의식, 축제를 빙자해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투영시켜 대속할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의식들, 이 모든 것을 함께 한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유대감. 내가 아는 것 중 이 모든 성질을 동시에 갖춘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종교. 남자들에게 여성 혐오는 단순한 중독 물질이 아닌 신봉해야 하는 교리였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한국은 두 글자로 줄여 ‘맘충’이라고 부르는 정서를 미국은 스토리텔링을 곁들여 유머러스하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직 낙원에 발 들여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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