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산호, 대양, 공동체, 관계중심, 상호의존, 의존성, 사랑의 지혜, 공감, 연민, 민감함, 상처 받기 쉬운, 보답받지 못한 사랑
브리다 "소울메이트가 뭔가요?"
위카 "처음엔 세상에 아주 적은 수의 인간들만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수가 있고, 이 새로운 영혼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몇 차례의 윤회를 통해 나뉘지. 크리스털과 별이 쪼개지듯이, 세포와 식물이 분열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분화되는 거야. 우리의 영혼이 둘로 나뉘고, 그 새로운 영혼들이 또다시 둘로 나뉘고, 그렇게 세대를 거쳐오면서 우리는 세상 곳곳으로 널리 퍼지게 돼 (...) 우리는 연금술사들이 '아니마 문디' 즉 '세상의 영혼'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사실, 아니마 문디가 분화만 계속한다면 그 수는 늘어나겠지만, 또 그만큼 점점 약화되기도 해.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나뉘는 것처럼, 다시 또 서로 만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재회를 '사랑'이라 부르지." -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중에서
이 단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를 읽기 전까지는.
위카의 말대로 우리는 정말 몇 차례의 윤회를 통해 한 사람에서 두 사람, 또 거기서 몇 사람 혹은 다른 어떤 생명체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먼 과거 어느 시점에는 남자였다가 언젠가는 풀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여자였다가 그다음엔 나무일 수도 있었던 어떤 존재인가? 이런 의미라면 윤회의 개념을 조금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세상 그 무엇도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 우리가 배운 과학에서 이런 걸 말하는 법칙이 하나 있다. "질량 보존의 법칙".
현대 물리학자들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우주의 탄생, 빅뱅으로 가져간다. 대폭발로 우주가 탄생할 때 만들어진 원자들이 지금까지 단 하나도 사라지거나 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자는 우주의 모든 요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나도, 당신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글을 쓰는 이 노트북도, 이 방에 있는 화초도 모두 '원자'라는 기본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어떤 원자들의 집합으로 어떻게 결합되어 있느냐만 다를 뿐이다.
이쯤 되면 현대 물리학자들이 하는 말이나 소설 속 위카가 하는 말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인간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죠? 이건 우리가 다시 원자 수준으로 분해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던 원자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서 어떤 것은 식물의 자양분으로 흡수되고, 어떤 것은 지렁이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것은 바위의 일부가 되고 어떤 것은 시냇물이 되겠죠. 이 물을 마신 어떤 생명체의 몸에 들어간 원자는 그 안에서 또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고 그게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에 나오는 일도 있겠죠? 결국 지금 당신이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원자는 흙이었으며, 어떤 식물이었으며, 바위였으며, 물이었으며, 어떤 생명체였던 것이죠."
이렇게 설명하는 물리학자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전생'이라고 부르는 건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 아닐까? 우주의 탄생과 함께 태어난 원자가 지닌 무수한 시간의 기억들이 나에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아닐까?
한편으론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을 가능성이 미래에 무엇이 될 가능성하고 대칭을 이룬다. 내가 죽어서 원자 수준으로 하나하나 분해되면 내 존재를 구성하던 원자들 중 어떤 것은 과거에 그랬듯 또 다른 존재의 구성 요소가 될 것이다. 코랄이 상징하는 '관계', '상호의존성' 안에도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나였고, 또 언젠가는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 말이다.
이쯤 되면 지금 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어쩌면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속에도 언젠가 당신 존재를 이루던 원자가 들어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에게 라면, 사람에게 라면 그 느낌이 더 특별해지지 않겠는가? 가족이 특별한 이유, 우리 가족,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딸, 우리 아들이 특별한 이유도 이런 것 아니겠는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사이, 엄마 아빠의 세포에서 시작된 우리라서 특별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너무 강해지면 분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으로, 우리 편과 남의 편, 우군과 적군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연결성을 강조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성에는 눈이 멀어버리는 현상. 일상에서, 역사 속에서 참 많이 보지 않는가?
또 '우리'가 너무 세면 구속이 시작된다. 집착이 시작된다.
"우리 집에는 너 같은 자식 없다!"라는 대사,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든 드라마에서든 어디선가는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는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가 만드는 말의 쇠창살, 그곳에 갇혀 산다면 '우리'는 감옥이 된다. 코랄이 말하는 '상호의존성'은 우리니까 다 똑같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너도 나와 같지"라는 말이 "나처럼 해"라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라는 말이 감옥이 되는 시발점은 보통 '사랑'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사랑, 연인을 바라보는 이의 사랑,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사랑 등등. 그 사랑이 지옥이 될 수 있기에 코랄은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니 당신도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언제나 강조한다. 그러니 당신 자신부터 사랑하도록 하라. 당신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 칼 G. 융,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 부글
바로 이거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우리 내면을 투사한 영화니까. 우리 마음 속에는 영사기가 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트는 영화를 두 눈으로 본다. 바깥에서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습들이 바깥 세상의 누군가에게 투사된다. "저 사람 완전 꼰대야!"라며 치를 떨고 있다면 당신 마음 안에 살고 있는 꼰대같은 당신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 다른 사람에게 갖다 붙이는 걸지 모른다. 공부하라는데 게임만 하는 아이를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난다면 그 아이에게서 당신의 그런 면을 보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다. 특히 사랑하는 이에게 화가 날 때, '나처럼 될까봐' 화가 나는 것 아닌가? '내가 들키기 싫은 내 모습'을 그 사람이 보여줘서 싫은게 아닌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 이를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하려면 먼저 내 마음 속 영사기부터 멈춰야 한다. 영원히 멈추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그에게 사랑을 주는 그 순간 만큼은 일시정지를 할 수 있어야한다.
마음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배우들이 역할에 몰입하면 할수록 영화를 중단하는게 어려워진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퇴장해야 이 영화가 멈춘다. 그들을 어떻게 무대에서 내려오게 할까? 배우들과 한명 한명 만나 그들의 캐릭터를 파악해보라.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심을 다해 말해줘라. "당신은 이런 캐릭터군요. 맞아요.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죠. 당신은 내가 맞아요." 그러면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당신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당신이 숨기려했던 그 모습이 실제 삶의 무대로 올라와 당신을 돕는다. 이렇게 당신은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 당신 안에 있는 천태만상을 인정하고 수용해주는데 세상 어떤 사람인들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코랄 컬러를 가진 당신은 바로 이런 사랑을 할 줄 아는 능력자다.
자기 내면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배우들을 실제 삶의 무대로 데리고 나오는 사람,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타인도 당신이 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당신 참 따뜻하다!
"성숙한 사람에게서 받는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에서 얻는 만족보다 더 큰 것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 사랑은 조용히 잔물결을 일으키며 과거로 되돌아가 부적합한 과거를 수리하고, 복구하고, 개조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 데이비드 리코,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 위고
당신과 닮은 사람, 당신의 짝이 지금 옆에 있나요?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의 마음에 쏙 들게 수염을 다듬어주는 사람, 마음이 통한 것이겠죠?
돌을 조각하는 장인은 돌에게서 독수리가 되고픈 마음을 알아챘네요!
우연히 마주친 길거리 예술가 앞에 발길이 멈춘 채 하염없이 서 있다면, 그녀와 나는 음악으로 연결된 것이겠죠?